


W. 키뿌 ( @qnqndirk189 )
현성x기영
조용한 집무실 안. 갑옷을 입지 않은 가벼운 정복 차림의 김현성이 종이 한 장을 손에 들고 있었다. 가늘어진 눈으로 한참을 종이 위에 적힌 글씨를 읽어나가던 그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종이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집중력이 그새 다 떨어졌나. 작은 글씨들은 몇 번이고 다시 읽어봐도 내용이 뇌 속까지 전달되지 않았다. 오전부터 쉬지 않고 일했는데. 책상에는 아직 김현성이 손도 대지 못한 서류들이 많이 남아있었다.
기영 씨라면 벌써 다 끝내놓으셨겠지. 나와 다르게 이런 일을 잘하시니까. 지금쯤 교황청에 있을 그의 얼굴을 김현성은 천천히 떠올렸다. 그러자 우울했던 기분이 저절로 나아지는 걸 알 수 있었다.
오늘하고 내일만 지나면 일 년에 단 하나뿐인 날이 다가온다. 바로 이기영의 생일이었다. 이미 한 달여 전부터 김현성은 그에게 줄 생일선물을 내일 경매에서 출품되는 상품들로 정해두었다. 전달하는 타이밍도 생일 당일에는 오전부터 여러 사람을 만나고 다니느라 바쁠 그의 일정을 고려해서 저녁에 길드 하우스에서 열리는 파티가 끝난 뒤를 노릴 계획이었다.
기영 씨가 선물을 마음에 들어 하시면 좋을 텐데. 지난 한 달 동안 몇 번이나 훑어봤던 상품 목록들을 다시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나같이 대륙에서 구하기 어렵고 그 가치를 이루 말할 수 없는 물건들이었다. 선물을 받고 기뻐할 반응을 상상할수록 김현성의 가슴 가득히 온기가 번졌다.
일이 아닌 다른 생각들이 머릿속을 채워가자, 김현성은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 있던 창문의 커튼을 걷어내니 주황색 노을은 거의 다 지고 어스름하게 물들어 가는 저녁 하늘이 보였다. 일어났을 때부터 쭉 집무실에 있었던 터라 시간이 많이 지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적당히 일하고 쉬고 싶어도, 주인공인데도 불구하고 생일 당일까지 쉴 틈 없이 일하려는 이기영을 위해 김현성이 자진해서 가져온 일감들이 책상에 남아있었다. 내일 경매 일정에 무사히 참석하려면 반드시 오늘 안에 끝내야 할 일들이었다.
흐트러진 집중력을 되찾으려면 바깥 공기를 쐬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섰다. 김현성은 그 길로 오전부터 머물고 있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밖으로 나가는 가장 가까운 출구 쪽으로 걸음을 옮긴 김현성의 눈에 바쁜 걸음으로 돌아다니는 몇몇 길드원들이 보였다. 진지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는 길드원들의 분위기는 상당히 부산스러웠다. 큰 소리가 나지는 않았지만 무슨 사건이 일어난 듯했다.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김현성을 길드원 중 한 명이 눈치채고 먼저 꾸벅 고개를 숙여왔다. 인사를 마치고 떠나려는 그를 김현성이 붙잡아 길드 안에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 물었다. 길드마스터로서 당연히 질문이었는데, 길드원은 의아하다는 낯이었다.
“부길드마스터가 예정과 달리 오늘 교황청에서 돌아오신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돌아오시기 전에 내일 저녁에 열릴 생일 파티 준비를 미리 끝내려다 보니…소란스러우셨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내일은 수요일이지 않습니까. 파티는 기영 씨 생일 당일인 목요일에 하는 게 아니었나요?”
“네? 오늘이 수요일인데요, 길드 마스터.”
“…….”
“…….”
“…….”
“그,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심상치 않은 공기를 읽은 길드원이 서둘러 자리를 피한 뒤에도 김현성은 그 자리에서 선 채 움직이지 못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삐걱거리는 움직임으로 주머니에 있던 손거울을 집어 들었다.
제발. 김현성은 길드원이 착각하고 있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간절한 마음과는 달리 그의 눈에 비친 화면은 오늘이 수요일이라는 현실을 더욱 확실히 알려주었다.
*
급하게 찾아간 경매장은 모든 경매가 종료되어 입장 자체가 불가능했다. 도심의 상가들마저도 술집을 제외하면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날개까지 펼쳐가면서 린델과 인근 도시까지 여러 번 돌아본 김현성은 다시 길드 하우스에 터덜터덜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다.
남은 서류들을 무슨 정신으로 훑어봤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김현성은 내일 당장 날이 밝는 대로 문을 여는 상가부터 전부 돌기로 마음먹었다. 상인들이 판매하는 물건은 그가 점찍어놓았던 물건들에 비하면 턱없이 가치가 낮을 게 분명했지만, 교국의 아이콘인 이기영의 생일을 맞아 평일임에도 휴일로 지정이 된 터라 대부분의 경매장은 운영하지 않았다. 반드시 생일 당일에 선물을 건네주고 싶었던 김현성에게 남은 선택지란 없었다.
하다못해 자정이 되자마자 가장 먼저 생일을 축하한다는 말이라도 건넬까도 생각했었다. 김현성이 인근 도시의 하늘 위를 날아다니는 동안 교황청에서 돌아온 이기영은 피곤하다면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고 한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의 방문 앞까지 직접 찾아가는 건 좋았으나, 굳게 닫힌 문을 차마 건드릴 수가 없었던 김현성은 힘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자신의 방 침대 위로 쓰러지다시피 몸을 눕힌 김현성은 오늘 하루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또 내쉬었다. 남아도는 게 힘과 체력인데도 무거운 마음이 김현성의 온몸을 무겁게 짓눌렀다.
아무리 종일 밖에 나가지도 않고 서류만 보고 있었다고 해도 가장 중요한 날짜를 착각해버리다니. 자신의 멍청함에 죄책감마저 몰려왔다. 만약 내일 상가에 들려도 괜찮은 물건을 찾지 못하면 어쩌지. 이기영이라면 뭐든지 웃으면서 받아주겠지만 김현성은 그에게 늘 좋은 것만 선물해주고 싶었다.
지금 나에게 있는 건 고작해야 이 몸뚱이 하나뿐인데. 내 몸 하나로 기영 씨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하다못해 선물에 어울릴 법한 모습이면 좋았을 것이다.
눈물로 조금 젖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김현성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마음이 무거운 것과 별개로 내일 열리는 파티에서 피곤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면 조금이라도 잠을 자둬야 했다. 김현성은 오지 않는 잠을 청하며 억지로 눈꺼풀을 내렸다.
*
몇 시간이 지났을까. 잠에서 깨어난 김현성은 눈을 떴는데도 여전히 어두운 시야에 당황했다. 설마 하루를 꼬박 잠으로 보낸 건 아니겠지. 선물 하나 준비하지 못한 상황에 지각까지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피가 싹 가시는 것 같았다. 서둘러 몸을 일으키려고 시도했는데 이상하게도 상체는커녕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게 없었다. 심지어 목소리마저도 뭔가에 꽉 막힌 것처럼 나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감을 잡기 어려웠다. 일단 악몽을 꾸거나 가위에 눌렸을 때와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몸이 마비된 것도 아니고 좁은 공간 안에 꼼짝없이 갇힌 기분이었다. 마력을 돌리는 일조차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자 김현성의 머리는 쉽게 냉정을 잃어갔다.
왜, 왜 이렇게 된 거지. 누가 도움을.
혼자서는 이 상태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떠오르는 이름은 하나뿐이었다. 기영 씨. 이기영이라면 자신이 어떤 상태에 빠졌는지 알 수 있을 거라는 희미한 기대가 꺼져가는 정신을 또렷하게 만들었다.
기영 씨. 여기로 와주세요. 기영 씨. 기영 씨.
이기영의 이름을 몇 번이고 되뇌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시간만 하염없이 흘러갔다. 고작 몇 분밖에 되지 않는 시간이었는데도 김현성에겐 아득하게 느껴졌다. 이대로 기영 씨가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불안정한 감정들이 가슴 속에서 넘실거렸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무력감과 불안감이 차곡차곡 쌓여만 갔다.
기영 씨…!
애타는 마음으로 부른 목소리를 정말 들은 걸까? 거짓말처럼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현성 씨. 안에 계시나요?”
기영 씨의 목소리! 김현성은 다시 한번 움직이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러나 방금까지 꿈쩍도 하지 않던 몸이 움직이는 기적은 벌어지지 않았다.
“현성 씨?”
방문이 느리게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느껴졌다. 방의 주인인 김현성에게서 대답도 들려오지 않자, 이기영이 직접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김현성은 어떻게 해야 그에게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전달할 수 있을지 고심했다.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만약 이기영이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고 떠나게 된다면. 언제까지 이 상태가 지속될지 알 수가 없다. 차라리 이게 다 꿈이었으면 싶었지만, 현실에서 느끼는 것과 같은 감각이 이건 꿈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었다.
제발 이기영이 자신을 찾아주기만을 간절히 빌고 있던 그때. 눈앞을 가로막던 짙은 어둠이 갑자기 걷혔다. 어둠이 사라지고 눈부신 빛이 훑고 지나간 시야에 이기영의 모습이 점차 또렷하게 잡혔다. 그가 한 손에 쥐고 있는 이불자락이 시야를 가리고 있던 원인으로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이기영은 조금 놀란 표정으로 누워있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영 씨! 역시 절 찾아주셨군요.
이불에 덮여있는 동안 갑갑하기만 했던 게 이기영을 보는 순간 뻥 뚫리는 듯했다. 울컥하기까지 하는 마음을 담아 바라보는데, 벅차오르는 심정의 김현성과 달리 이기영의 표정은 떨떠름해 보였다.
“뭐야…우리 현성이는 어디 가고 웬 인형이 여기에 있어?”
황당하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 나서야 김현성은 깨달았다. 가까이 다가온 이기영이 평소보다 훨씬 크게 보인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의 투명한 눈동자 속에 비쳐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 사람이 아니라 단순하게 생긴 인형이라는 것을.
*
동이 튼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 이기영은 홀로 김현성의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길드원들이 활동하기에는 이른 시간이다 보니 인적이 드문 복도를 걷는 그의 얼굴엔 초조함이 가득했다.
아침부터 사람 불안하게 만들고 말이야. 아직도 귓가를 맴돌고 있는 듯한 소리에 이기영은 걸음을 더 빨리했다.
잠에서 깨어나기 직전,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뚜렷하진 않았지만 반복되는 음성은 아주 익숙했으며 이기영은 그것이 김현성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라고 확신했다.
눈을 뜨자마자 바로 망원경을 돌려 주변을 샅샅이 뒤져봤으나 김현성의 모습은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잘만 작동하던 망원경이 전조도 없이 망가질 이유는 없고. 김현성의 평소 행적을 고려해봐도 현재 그가 있어야 할 장소는 길드 하우스에 마련된 그의 방 말고는 없었다.
어디 갈 곳도 없는데 왜 보이지 않는 걸까. 솟구치는 불안감을 견디지 못한 이기영은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김현성을 직접 찾아 나섰다. 멀지 않은 그의 방문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잠옷 차림에 간단한 세수조차 하지 않았다는 게 뒤늦게 떠올랐지만, 지금은 그런 일까지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다만 잠에서 깨기에는 이른 시간이라는 자각만은 있었기에 문을 벌컥 열어젖히기에 앞서 문을 두드렸다.
“현성 씨. 안에 계시나요?”
정중한 노크 소리가 울린 다음에도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기영은 속으로 몇 초를 센 다음 잡고 있던 문고리를 힘주어 돌렸다.
“현성 씨?”
문을 열자 망원경으로 훑어봤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방이 이기영을 맞아주었다. 재빨리 방안을 훑어봐도 주인이 없다는 걸 제외하면 딱히 이상한 점도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딜 간 거야, 이 자식은. 아침부터 사람 걱정하게 만들고. 흔들리는 눈빛으로 방안을 살펴보던 이기영은 침대 이불이 볼록 솟아있는 걸 발견했다. 혹시 저기에 김현성이 남겨둔 단서라도 있지 않을까. 급히 침대로 다가간 이기영이 이불을 걷어냈다.
이불 아래에 있던 건 단서도 뭣도 아니었다. 작은 솜인형 하나가 마치 침대의 주인인 것처럼 누워있을 뿐이었다.
“뭐야…우리 현성이는 어디 가고 웬 인형이 여기에 있어?”
인형을 마주하자 쌓여있던 불안감이 확 풀어질 정도로 황당함이 밀려왔다. 왜 이런 게 김현성의 침대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심지어 인형은 김현성의 모습을 그대로 본뜬 것처럼 닮았다. 혹시 우리 길드 굿즈팀에서 만든 건가. 이기영은 누워있는 인형을 한 손으로 잡아 올렸다.
“귀엽긴 귀엽네.”
축 처져있는 강아지 모양의 귀와 울먹거리는 두 눈.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얇은 입매. 거기에 정교하게 만들어진 길드 정복과 보송보송한 털이 달린 망토까지 야무지게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평소 장난감을 모으는 취미가 없는 이기영이 보기에도, 발견한 장소가 김현성의 방이 아니라 시장 바닥 가판대였더라면 망설이지 않고 골드를 꺼낼지도 모를 만큼 솜인형은 귀여운 외모를 자랑했다. 우리 길드 굿즈 퀄리티가 이 정도 수준까지 좋아졌을 줄이야. 역시 한소라에게 자문을 맡겨보길 정말 잘한 것 같았다.
나도 몰랐던 자기 인형을 현성이는 언제부터 갖고 다닌 거지? 순수하게 감탄하던 이기영은 인형이 입고 있는 옷을 뒤집어 보기도 하고, 틈을 벌려서 감춰진 속살을 보기도 했다. 손도 발도 주먹을 쥔 것처럼 동글동글하면서도 말랑말랑한 촉감을 가진 평범한 솜인형이었다. 어린애들도 갖고 놀 수 있으니 여기서 더 정교하게 구현하는 건 어려웠겠지.
손에 들고 한창 만지작거리는 와중에 이기영은 인형의 피부 색깔이 처음 발견했을 때 비해서 분홍색으로 변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표정도 아까와 미묘하게 다르고. 이러니까 꼭 부끄러워하는 것 같은…. 어라. 이건 혹시.
“현성 씨?”
이기영은 손에 들고 있던 솜인형을 바라보며 소리 내어 말해보았다. 김현성의 눈 색과 똑같은 푸른빛 자수가 촘촘하게 박힌 눈동자가 짧은 순간이나마 반짝인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이기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음소리를 흘렸다.
“내가 미쳤지. 설마 이게 김현성이겠어.”
해마다 온갖 말도 안 되는 사건사고가 시스템과 신성을 핑계로 터지는 대륙이라지만, 하루아침에 사람(비록 신에 가까운 존재이긴 해도)이 이런 솜인형으로 변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애도 아니고 인형에게 말이나 걸다니 창피한 짓을 했네. 이기영은 솜인형을 제자리에 다시 놔두기로 했다. 이러고 있을 시간에 밖에 나가서 김현성을 찾아야만 했다.
그런데 침대에 내려놓고 손을 떼면서 마주친 솜인형의 눈빛이 어쩐지 기분을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처음 봤을 때는 마냥 사랑스럽게만 보이던 얼굴이 지금은 이기영에게 데이트를 거절당했을 때 잔뜩 풀이 죽은 상태의 김현성과 매우 흡사해 보였다.
이런 표정은 내 앞에서만 보여주는 건데. 잘도 이런 걸 다 구현했네? 만들기 전에 현성이를 몰래 관찰이라도 하고 있었나. 강아지 귀가 없어도 충분히 강아지 같았던 김현성을 떠올리며 이기영은 인형의 뺨을 엄지손가락으로 슬슬 어루만졌다. 그러다 인형의 작은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어서 김현성을 찾으러 가야 한다는 마음과 달리 좀처럼 자리에서 떠나지 못하던 이기영은 충동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조그만 솜인형 위로 이기영의 입술이 살짝 닿았다. 인형 특유의 보들보들한 천의 감촉이 맞닿은 부위를 통해 고스란히 느껴졌다.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지켜보는 사람이 없긴 해도 상당히 부끄러운 일을 저질렀다는 생각에 이기영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제 진짜 현성이나 찾으러 가볼까. 이기영은 굽힌 허리를 바로 세우려고 했다.
그때 밑에서 갑자기 얼굴을 잡아당기는 힘에 이기영은 도로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놀랍게도 방금까지 침대에 누워 꿈쩍도 하지 않던 솜인형이 벌떡 상체를 일으켜 세우더니, 두 손을 뻗어 이기영의 턱을 잡고 얼굴을 들이댔다.
“우읍?!”
놀라서 굳어버린 이기영과 다르게 솜인형은 상체를 세우는 것만으로 모자랐는지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서 몇 번이고 이기영의 입가에다가 제 입을 문질러댔다. 부드러운 천의 감촉은 아까와 똑같았지만, 난데없이 강제로 입맞춤을 당하는 상황이었다. 혼미해지려던 정신을 겨우 붙잡은 이기영은 열렬한 키스 세례를 퍼붓는 솜인형을 밀쳐내려 했다. 쉽게 떨어뜨릴 수 있을 거란 예상과 달리 인형은 이기영이 아무리 밀어내도 좀처럼 물러나지 않았다. 마치 이기영에게 파고들기 위해 매달리던 김현성처럼.
“즈, 잠깐, 만!”
참다못한 이기영이 입술 사이로 큰 소리를 내고 나서야 솜인형은 떨어져 나갔다. 자기가 벌인 일에 자기가 놀란 듯이 짧뚱한 팔이 허공 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다 뒤늦게 자신의 팔과 다리를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침대 위에서 깡충깡충 뛰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당연히 알 수밖에 없었다.
“하아, 현성 씨? 정말로 현성 씨예요?”
이기영의 물음에 솜인형, 아니 김현성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영 씨! 기영 씨!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착각이 일었다. 보아하니 몸을 움직이는 것까진 할 수 있어도 눈동자를 굴리거나 입을 열어 말하지는 못하는 듯했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런 모습, 을.”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침착함을 잊었던 이기영은 재빨리 마음의 눈으로 솜인형 상태의 김현성을 바라보았다. 마음의 눈 앞에 비친 솜인형의 스펙은 몇 번이고 보았던 김현성의 스펙과 똑같았다. 어째서 이 작은 솜방망이에 벗어나지 못하고 입맞춤을 당해야만 했는지 이해가 갔다. 대륙최강이 솜인형이라니. 정말 웃기지도 않은 농담이었다.
이기영은 마음의 눈에 이어 이번에는 회귀자 사용설명서를 사용했다. 현재의 김현성은 말은 물론 필담도 불가능해 보여 일의 자초지종을 알기 위해선 스킬을 쓸 필요가 있었다. 금색으로 변한 이기영의 눈동자에서 빛이 확 피어오르는데, 놀랍게도 자수로 만들어진 솜인형 김현성의 한쪽 눈도 이기영과 비슷한 색으로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시바, 회사설 스킬도 작동되잖아? 근데 말은 왜 못하는 건데? 순간적으로 욕설을 중얼거릴 뻔한 이기영은 황급히 자의식을 억눌렀다. 다행히 김현성에게 흘러가기 직전에 막을 수 있었다.
방금까지 열심히 입술을 비벼대던 그 대담함은 어디로 다 가버렸는지 김현성은 뭉툭한 손과 발을 꼬물거리면서 눈치를 살폈다. 이기영은 밀려오는 감정의 흐름에 눈썹을 치켜떴다.
김현성으로부터 밀려오는 감정들은 하나같이 매우 단순하면서도, 동시에 격정적이었다. 눈을 떠보니 갑자기 이런 몸이 되었다는 당황스러움. 움직이지 않는 몸과 나오지 않는 목소리. 마력도 쓰지 못한다는 상황에서 비롯된 두려움. 그런 상황 속에서 이기영이 자신을 찾아줬을 때 느꼈던 기쁨. 만나기는 했어도 자신의 상황을 전달할 길이 없어서 몰려오는 슬픔. 마지막에는 이기영이 입을 맞춰주자 파도처럼 밀려오는 드높은 행복감이 뇌리를 잠식해왔다.
쉴 틈 없이 벅차오르는 감정의 홍수 속에서 이기영은 목 언저리가 타들어 가는 걸 느꼈다. 이 새끼 감정 하나 풍부한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고작해야 키스잖아. 지금까지 몇 번이나 했는지 기억도 안날만큼 실컷 했었잖아. 그런데도 그렇게 좋아? 얼굴로 열이 모이는 걸 애써 외면하며 이기영은 스킬 사용에만 집중했다.
“현성 씨. 겉모습 말고 또 평소랑 달라진 건 없어요?”
김현성은 뭔가를 곰곰이 떠올리는 것처럼 가만히 발끝만을 바라보다가 팔 하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 솜인형 상태라서 그런지 원래 상태였을 때보다 전달되는 내용이 구체적이진 않았지만 전하고자 하는 말이 대략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다.
어제부터 실수로 이기영에게 줄 생일선물을 구하지 못해서 고민하고 있었다는 것과 스킬창에 못 보던 스킬 하나가 추가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문제의 스킬명에 대해서도 전해 듣게 된 이기영은 이걸 기뻐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스킬명이 단 한 사람을 위한 선물, 이라. 작명 하나는 기막히네. 정말로.
“진짜 스킬이라면 해제도 가능한 거죠?”
김현성의 동그란 머리가 움찔거렸다. 설마. 해제가 안 된다는 건 아니겠지? 이기영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김현성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딴청을 피울 뿐이었다. 그 모습에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하던 이기영의 입이 다물렸다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이 일은 김현성이 독단적으로 신성을 사용하면서 벌어진 일이라고 해석하기로 했다. 그 김현성이 솜인형이 되다니. 진짜로 서프라이즈 한 선물 이긴 선물이었다. 또 이런 식으로 날 놀라게 했다간 바깥양반이고 뭐고 간에 집에서 내쫓아버렸겠지만 말이야.
김현성도 이번 일이 자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걸 알았는지 시무룩한 모습이었다. 원래도 비 맞은 강아지 같았던 얼굴이 눈에 띄게 가라앉았다. 분명 눈도 코도 입도 움직이지 않는 단순한 솜인형의 외견인데도 분위기가 그렇게 만들었다. 정말 쓸데없이 귀엽네. 이기영은 김현성에게 제대로 된 화조차 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지금 상황에서 김현성의 기분이 더 안 좋아졌다간 또 이상한 모습으로 변할지도 몰랐다. 새롭게 스킬을 만든 시점에서 상당한 양의 신성이 소비되었을 거라 큰 변화는 없을 것으로 보이나,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이기영은 침대에 내려놨던 김현성을 다시 두 손으로 잡아 들었다. 평범한 인형이라고만 여겼던 조금 전과는 달리 지금은 진짜 김현성이라는걸 알고 있으니 떨어뜨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스럽게 품에 안았다.
품에 안긴 김현성은 분명 솜인형인데도 불구하고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떨굴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말라고 이렇게 안아주는 건데. 이기영은 서글퍼 보이는 둥그스름한 머리를 손바닥으로 살살 쓰다듬어주었다.
“쉽게 말하자면 제 생일선물이 현성 씨 자기 자신이라는 거죠?”
이기영의 말에 김현성의 피부가 핑크빛으로 변해갔다. 이기영이 뭣도 모르고 옷을 들춰봤을 때처럼 부끄러워진 모양이었다. 이미 서로 다 볼 거 본 사이에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 솜뭉치 같은 손으로 달아오른 두 뺨을 어떻게든 가려보려고 애를 쓰는데, 그래봤자 팔이 짧아서 다 보일 뿐이었다. 지나치게 귀여운 모습에 입꼬리가 제멋대로 씰룩거리는 걸 가까스로 참아낸 이기영은 품 안의 작은 김현성을 다시 고쳐 안았다.
“어쩔 수 없네요. 생일선물이시면 생일선물답게, 저랑 오늘 하루 종일 함께 계셔야겠어요.”
오늘이 제 생일이잖아요. 네? 김현성은 멍하게 이기영을 올려다보다가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아침에 몸길이는 삼십 센치도 안 될 만큼 작아진데다가 말도 못 하는 상태가 되었으면서, 이기영과 같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마냥 기뻐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결국 이기영은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며 작고 둥근 김현성의 머리에다 입을 맞추었다.
같이 있기라도 해야 스킬을 해제할 방법을 찾든 말든 하니까 꺼낸 말이지만. 뒷말은 굳이 꺼내지 않았다. 지금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건 여태까지 받았던 생일선물 가운데 가장 사랑스러운 선물이었으니.
*
[스킬 : 단 한 사람을 위한 선물]
[소중하고 소중한 한 사람을 위해 온몸을 바치는 선물. 소중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사랑을 받으면 받을수록, 처음 스킬을 사용했을 때 걸린 제약이 약해지면서 점차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