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 피져 ( @pizur0909 )
현성x기영
그러니까 그건 실수였다.
우연히 김현성은 이기영의 구두가 꽤 낡은 것을 보았고, 새것을 선물해주고 싶다고 생각했고, 린델에서 제일가는 가게에 발 크기만 가지고 주문을 넣었다. 가게 주인은 어떻게 봐도 김현성이 신을 수 없는 작은 치수를 놓고 고민하다가 선물용이라고 했으니 이 치수면 여성이겠지 하고 판단했고…. 그 결과가 오랜만에 가방 이외의 선물을 받아 들뜬 마음으로 열어젖힌 상자의 결과물이었다.
"현성 씨, 설마…."
"아, 아닙, 아닙니다. 기영 씨께서 생각하시는 건, 네, 절대 아닙니다. 절대로!"
가늘게 눈을 뜬 채 저를 올려다보는 이기영의 모습에 김현성은 서둘러 부인했다. 흐음, 제가 무슨 말을 하려 했던 건지는 아시고요? 되묻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시뻘건 얼굴을 하고서 김현성은 고개를 푹 숙였다. 시선의 끝에 열린 상자 속 구두가 보였다. 검은색, 굽이 아주 높지 않은 것으로. 고급스러운 가죽을 써 은은하게 광택이 도는 것. 오래 걸어도 피곤하지 않은 것으로. 주문한 그대로의 물건이다. 문제가 있다면 그게 여성용 힐이라는 거지만.
이기영은 손끝으로 구두를 살짝 들어보았다. 사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포장지로 쓰인 고급 비단이 흘러내린다. 사실 처음에야 김현성이 선물을 바꿔 준 건 아닌지, 누구에게 줄 구두였는지 의심했지만 말 한마디에 저렇게까지 쩔쩔매는 걸 보니 의심할 수가 없었다. 아마 주문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다던가, 뭐 그런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손은 반대편 구두도 꺼내 책상 위에 놓았다. 딱, 뒷굽이 나무에 부딪히며 맑고 경쾌한 소리가 났다. 이제는 그만 놀리고 김현성에게 도로 가져가서 반품하라고 하던지, 아니면 남성용으로 바꿔오든 하라고 할까 생각하던 차에… 갑자기 짓궂은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 구두는 현성 씨가 제게 주시려고 한 게 맞나요?"
"네, 네? 어, 네 마, 맞습니다. 그렇긴 한데… 그게…."
"감사합니다. 좋은 가죽이네요. 부드러워서 마음에 들어요."
"감사합니다. 그…."
화를 낼 줄 알았는데 감사 인사를 들어버린 이유를 알 수 없었던 김현성이 눈을 깜박였다. 이기영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온다. 얼떨결에 한 걸음 물러나자 그대로 책상 위에 걸터앉았다. 손끝을 구두와 발뒤꿈치 사이에 밀어 넣어 천천히 신고 있던 것을 벗었다. 툭, 툭. 양쪽 구두를 전부 벗고 마찬가지로 양말 역시 그 위로 떨어져 내렸다. 작고 하얀 맨발이 드러나는 동안 김현성은 멍하니 그 광경을 보고만 있었다. 너무 비현실적이었던 탓이다. 책상 위에 올라앉아 까닥이는 발을 따라 시선이 오갔다. 이기영은 살짝 웃더니, 뒤에 놓아두었던 구두를 집어 들어 가지런히 제 무릎 위에 올렸다.
"신겨 주실래요?"
"…."
솔직히 말하자면 이기영은 힐을 신는 게 처음은 아니었다. 이기연으로 지낼 때 몇 번 신어보기도 했고. 다만 김현성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 궁금했을 뿐이다. 아마 부끄러워하며 도망치거나, 얼른 바꿔오겠다고 가져가 버리거나… 이어지던 상상은 곧장 무릎을 꿇은 김현성 때문에 멈췄다. 희미하게 붉어진 귀가 까만 머리카락 사이로 보인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땀까지 흘린 듯 끄트머리가 조금 젖어 있었다. 그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마치 잡아먹을 것처럼 깊게 숨을 들이 내쉬고는 무릎 위에 있던 힐을 하나 집는다.
시작은 왼발부터였다. 커다란 손이 약간 차가운 발을 쥔다. 딱히 작다고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김현성의 손 위에 있으니 너무 작아 보였다. 마디가 굵은 손이 발등을 살짝 긁고, 검은 힐에 하얀 발을 밀어 넣는다. 디자인의 문제였을 뿐, 크기는 그를 위해 맞춘 것이기에 놀라울 정도로 잘 맞았다. 드러난 발등과 발끝에 스치는 손의 온기가 이상할 정도로 낯간지러웠다.
오른발을 쥐는 손은 조금 축축했다. 긴장돼? 물어볼 수 없는 질문이 입 안을 맴돈다. 그러나 떨지 않고 김현성은 마찬가지로 천천히 힐을 신겼다. 마치 시종이라도 된 것처럼 정중하고 느린 움직임이었다.
'…장난이었는데, 기분이 이상하네.'
발끝을 꼼지락대며 이기영은 동그란 가마를 내려다보았다. 평소에 개… 아니 강아지 같다고 생각하던 회귀자였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저 같은 비전투원쯤 손가락 하나로도 제압 가능하단 걸 안다. 그런 존재가 이렇게 말 한마디에 고분고분 무릎 꿇고 이상한 부탁도 망설임 없이 들어준다는 건 꽤 묘한 기분이었다. 만족감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긴장감이라고 해야 할지.
"현성 씨."
"…네, 그, 죄송합니다."
이미 목적은 이뤘음에도 좀처럼 발에서 손을 떼지 못하던 김현성이 미련 가득한 손을 물렸다. 책상 위에 앉은 탓인지, 바닥에 닿지 못한 발은 김현성의 무릎 위에 놓였다.
이제 슬슬 장난을 끝내고 이대로 웃으며 마음은 감사하다고 물리면 될 텐데…. 이상하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기영이 더 말하지 않자, 김현성은 머뭇거리면서 그를 올려다본다. 얌전한 체하고 있지만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곧장 밀어붙이겠지. 알면서도 넘어가 준 게 얼마였던가.
발을 들어 그의 어깨에 가볍게 올렸다. 일부러 발목과 종아리가 잘 보이게끔 뺨을 쓸어 맨살을 비빈다. 김현성의 뺨은 뜨거웠다. 억누르지 못한 숨이 맨살에 닿아 간지럽다.
"그러고 보니, 며칠 뒤가 제 생일인데요."
"죄, 죄송합니다."
이번엔 진짜로 당황했다. 어쩔 줄 몰라 하며 눈을 피한다. 아마 이 구두가 생일 선물 중 하나였을 텐데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할 말이 없겠지. 이기영은 웃었다. 사실 신발쯤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김현성이 주는 선물이 고작 이것 하나일 리도 없고. 오히려 자신이 말리지 않으면 어디서 또 자신도 모르는 도시를 하나 개발해서 갖다 바칠지도 모를 일이다. 구두 하나로 끝나주는 게 차라리 고맙다. 그러나 그걸 솔직하게 전하는 대신, 일부러 놀리듯이 입을 연다. 선물은 현성 씨가 좋겠어요.
솔직히, 장난이 지나쳤다는 걸 인정한다. 분위기를 조금 탄 탓도 있다. 그러나 당황할 줄 알았던 김현성은 그 말에 되레 웃었다. 뜻밖의 반응에 이기영이 놀라 바라보자, 김현성은 공손하게 제 손에 양발을 쥔 채 드러난 발등에 차례대로 입 맞추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이기영은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김현성이 웃는 게 그 와중에도 느껴져서 더 견디기 힘들었다. 그런 게 선물이 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저는 이미 기영 씨의 것인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