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무제-1.png
제목-없음-1.png

W. 니인생의걸림돌 ( @YtfZInWvHlOQeI2 )

​진청x기영

이기영 생일 축하 합작 if 두더지 성녀 던전 전멸 루트

*
무너진 진영과 함께 꺾인 깃발이 힘없이 하느작거렸다. 어디선가 불에 탄 듯한 매캐한 냄새가 코끝을 불쾌하게 찌르며 피와 땀 냄새가 뒤섞였다. 그 어떤 전쟁이든 패잔병들의 모습은 비참하기 마련이었다. 두더지 성녀 던전에서 연합군은 패퇴했다. 일부 병력이 잔존했지만 주 네임드들은 전부 잃었기에 그들의 생환은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대륙의 정예군을 괴멸시킨 두더지 성녀 던전은 머지않은 미래에 붕괴하고, 그 안의 괴물들이 대륙에 풀려나 날뛸터인데 현존하는 인류 최강자들이 몰살당할 정도의 몬스터들을 남은 쭉정이 같은 이들로 막는 다는 것은 쏟아지는 빗방울을 손바닥으로 막는다는 것 만큼이나 터무니 없는 일이었다.


쓸모 있는 말을 전부 잃은 채 폰 만으로 체스를 두어봤자 승부가 될 리 없었다. 시간을 끌고 나머지 말들을 전부 희생시켜 가까스로 퀸을 하나 만들어낸다 한들 그뿐, 고작 그걸로는 제대로 된 게임이 될 리 만무했다. 이곳에 더는 그 어떤 작은 가능성이나 희망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실은 살아남은 병사들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저들은 목숨은 건졌지만 더이상 검을 들어 올리지 못할 것이다. 압도적인 공포심과 존재감에 짓눌린 기억은 선명하게 뇌리에 새겨져 다시 그 규격외의 존재에게 감히 맞설 생각조차 하지 못하리라.

 


"군사님, 명예 추기경님은 저희가 돌보겠습니다."


"외상은 없으니 굳이 사제가 붙어있을 필요는 없다. 명예 추기경은 내가 돌볼 테니 다른 병력을 회복시키는데 집중하도록."

 


이기영은 두더지 성녀 던전의 최종보스 바하무트와 직접 조우했으나 파란의 네임드 전원의 희생으로 유일하게 생존했다. 본인은 살아도 산 것 같지 않겠지만. 시신조차 온전히 건질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의 처절한 보호 아래 부상은 없었으나 패전 소식과 함께 예견된 결과를 직접 마주하자 현실을 견디지 못하고 발작적으로 울음을 터트리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이성을 놓은 끝에 결국 실신해 옮겨졌다.


수차례 의식이 들었지만 그때마다 몇번이나 제 동료들을 찾으며 발작을 일으키길 수차례, 겨우 회복되기 무섭게 그 난리를 피운 끝에 겨우 잠든 낯빛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아마 그는 육신은 몰라도 정신은 영영 회복하지 못할 것이 자명했다. 그만큼 녀석은 저들에게 심적으로 의존했고, 저들이 그에게 차지하는 비중이 컸기에 그 빈 곳을 그는 평생 대체할 수 없을 것이다.


잠든 그의 눈물자국이 난 뺨을 한번 쓸어내린뒤 잠시 밖으로 나섰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미 이 세계에 가능성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을 놓을 수도 없는 일이었기에 더더욱 답이 없는 문제의 답을 찾기 위해 남은 로그를 뒤지고, 살아남은 병력을 점검해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결국 현상 유지조차 되지 못할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편하게 쉴 수 있도록 분명 혼자 있게 해준 그의 숙소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위협적인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으나 연약한 것에 더해 무방비한 그에게는 충분히 위협적이었기에 다급히 돌아가자 보이는 것은 의식을 잃은 그에게 시뻘겋게 불거진 눈을 한 채 당장이라도 더러운 손을 뻗으려드는 흥분한 듯한 사내들. 목적은 뻔했다.

 


"감히 총사령관에게 손을 대려 하다니, 하극상인가."


"그, 그런 게 아닙니다. 저희는 그러니까, 그게..."


"어차피 지금 이 상황에 총사령관이고 나발이고, 무슨 상관이...!"


"반역 행위는 마땅히 즉격처분감이다."

 


더 들어줄 가치도 없이 목을 잡아 비틀었다. 눈앞에서 이어지는 즉결 심판을 보고 도망치려고 든 머저리는 마력의 불꽃을 휘감아 그자의 몸을 불살랐다.

 


"...엉망이로군."

 


파란이라는 울타리가 사라진 지금 나약해진 그는 그저 먹음직스러운 먹있감으로 보였던 모양이었던 것 같다. 감히 손도 댈 수 없었던 고귀한 보석이 진창에 굴러다니는 모습을 보고서 고작 제까짓 것들이 손댈 수 있으리라고 멋대로 판단을 내린듯 했으나 저열하고 추잡한 욕구를 방출하려는 이들은 본질이 썩어있는 존재라는 증거였다.


약자에게 손대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대다수가 행해야겠지만 그런 추저분한 짓을 시도한 것은 일부 사내놈들인 것에 더해 정상인들은 아무도 그딴 역겨운 생각조차 안 하지 않는가. 또한 비단 여기 뿐만 아니라 어수선한 틈을 타 일부 멍청이들이 함께 동고동락하며 사선을 함께 했던 동료 여자들에게 손을 대려고 하다가 그대로 반격당했다. 당연히 그녀들에겐 책임을 묻지 않았다.


기강을 흩트린 얼간이들의 더러운 몸뚱이는 태워버리고, 장식용으로 쓰이던 텅 빈 머리통은 장대에 걸어 본보기를 보이고서야 멍청이들에게 이성이라는 것이 생겨났다. 전체적으로 최악인 상황에 더욱 파국으로 치닫는 상황이었다. 이런 패전 소식이 외부에까지 알려진다면 그로 인한 혼란은 더욱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렇게까지 망가져 가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그의 곁을 지키는 것 뿐이었다. 차라리 그것이라도 할 수 있는 게 다행이었다. 한참을 옆을 지킨 끝에 겨우 정신이 든듯 또록 눈을 굴리며 무엇을 찾는 듯 두 눈동자가 허공을 배회하다 곧 자신이 찾는 것이 어디에도 없음을 깨닫고는 체념어린채 가라앉은 눈이 내리깔렸다.

 


"..이기영."


"..괜찮아. 다시 시작하면 되니까... 처음부터, 전부... 다시... 이번에는... 반드시..."

 


자신을 위로하듯 내뱉는 혼잣말에서 정신이 삐걱대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목표의식 하나로 가까스로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었지만 그는 당장이라도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겨우 몸만 건사한 채 빠져나오느라 시신은 커녕, 유품 조차 거둘 수 없었기에 무덤을 만들 수 없어 가슴에 묻어야만 했던 목숨의 무게들을 감당하지 못한 채 텅 빈 마음에 미련들이, 후회가 흘러넘쳤다.


대륙의 중심이 되어 이끌어야하는 그는 당장 자기자신 하나 건사하기 힘들었다. 희망따위 관측할 수 없는 이 대륙에서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그가 이전에 말했던 3회차의 재시작.

 


"흐윽... 흐... 전부, 죽이고... 그렇게 다시 시작하는거야... 그럼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겠지...? 이번에는 모든게 완벽해질테니까..."

 


흐느끼는 것인지, 실성한 광소를 터트리는지 모호한채 어깨를 떠는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본디 지키는 것 보다 공격하는 쪽이 유리하기 마련이었으며 쓸만한 인재를 전부 잃은 대륙의 말로는 뻔했기에 그 시기를 조금 앞당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쓸만한 인재들을 대부분 잃은 대륙에 남은 이들은 오합지졸에, 이제는 구심점 조차 잃었으니 분열해서 더욱 약해지고, 이러한 균열은 이간질을 부추기기에 최적의 상태였다. 마땅한 호적수 또한 없으니 대륙의 멸절을 앞당기는 것은 유아용 퍼즐마냥 손쉽기 그지없었다.


모든 생명의 끝을 목전에 두고서 한때 누군가의 터전이었던 장소들은 시선이 닿는 곳마다 전부 폐허였다. 개미 새끼 한마리 조차 남아있지 않는 텅 빈 세상에서 결국 나는 그와 단 둘이 남았다. 어디서 주워 온 것인지, 한참 전부터 얼굴을 가릴 의미는 사라졌건만 세계를 다시 시작하기 위한 작업을 하는 내도록 뒤집어쓰고 있던 가면을 겨우 벗어낸채 로브를 걸친 이기영이 이 공허한 세상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군사님, 나를 위해 죽어주세요."

 


주륵 흘러넘치는 눈물에도 그조차 느끼지 못하는지 무감한 얼굴로 애원하듯 요구해왔다. 겨우 드러난 얼굴은 그동안 제대로 잠을 청한 적이 없는듯 눈밑이 거뭇했다. 그의 무력으로 자신을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타의로 저를 죽이기 위해서는 그가 말했던 1회차처럼 다른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어야 했겠지만 이미 그 타이밍은 놓친지 오래였다. 더군다나 이쪽은 그에게 협력했으니 구태여 중간에 제거하기도 애매했을 것이다.

 


"......"


"원하시는게 뭔가요?"


침묵하는 내게 그가 물어왔다. 이미 모든 것을 잃은 그는 그러기에 지불하지 못할 대가가 없었다.


"명예? 이번에는 애초부터 군사님을 악마 소환사로 몰지 않도록 맹세라도 할까요? 아니면, 달리 원하시는 것이 있다면 최대한 수용적으로 검토할테니 말씀해보세요. 빨리."


"..너를 요구한다면..."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처럼 위태로워보이는 그의 모습에 무심코 내뱉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급하게 입을 맞춰왔다. 버석하게 말라 갈라지고 튼 입술이 포개어지며 달려들듯 부벼져왔다. 그 행위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더는 제 몸뚱이에 가치조차 느끼지 못하는듯 함부로 굴리려드는 모습에 어깨를 잡고 천천히 떨어트리자 오히려 불만스러운 얼굴이 보였다.

 


"할거면 빨리 해치워요. 만족할만큼 상대해드릴테니까."


"짐승처럼 접붙을 생각은 없다."


"...하, 더럽게 까다로우시네. 달리 뭘 해드릴까요? 사랑한다는 말? 그럼 좀 다르게 느껴지실려나..."


"제대로 분위기는 잡아야지 않겠나."

 


더이상 이 대륙에 돌아가는 생산시설따윈 없었으나 마법으로 물을 기르고 또 데우며 이전의 문명 사회 마냥 생활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이 넓은 세상에 고작 둘뿐이니 아직 남아있는 생필품만으로도 둘이 쓰기엔 충분했다. 깨끗한 물을 욕조에 가득 담고, 입욕제까지 넣자 멸망한 세계의 풍경으로는 보이지 않는 평범한 하루 일과가 되었다.

 


"..이딴게, 더는 무슨 의미가 있다고..."


"그래, 일종의 생일 선물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이미 의미를 잃어버렸으나 오늘은 네 생일이었지 아마."


"..하."


"마무리는 제대로 되어야지. 어차피 지금 이순간은 별다른 의미가 되지 못할 사라질 과거의 한순간에 불과할 것이다. 깔끔하게 끝내는건 네게도 썩 나쁜 일이 아닐터."

 


비록 보존식품 밖에 없으나 그런 재료로나마 간단히 조리를 거치자 그럴싸한 음식이 만들어졌다. 매일같이 포션따위로나 때우던 그는 간만에 제대로된 음식을 앞두고도 시큰둥하기 그지 없었다.


지독한 우울에 시달리는 만큼 미각의 둔화를 고려해 최대한 향과 식감은 살렸으니 그럭저럭 즐길만은 하겠지만 정말 지독히도 맛 없게 먹는 모습은 무례할 정도였지만 그래도 어찌 장단을 맞춰주려는 시도는 하면서 느릿하게나마 식기를 놀려왔다.

 


"회귀는, 최후에 살아남은 이를 대상으로 진행되는 것인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더군요. 아니면 적어도 희생하는 신이 지정하겠죠."


"그리고 단 한명뿐으로 인원 제한도 있는 것 같군. 네가 김현성과 함께 회귀하지 않은 것으로 봐선 말이다."


"같이 못가는게 아쉽나봐요. 하긴, 안그래도 잘난척 하는 양반이 미래까지 알고 있으면 얼마나 재수없게 굴까. 자기 빼곤 다 우민으로 보겠지. 안봐도 뻔한데 그걸 생각하면 차라리 잘 된 것 같네요."

 


단란한 저녁 시간은 기대조차 하지 않았기에 나뉘는 대화는 달콤함은 조금도 없이 건조하고 텁텁하다 못해 쌉싸름한 내용들 뿐이었다. 어쨌든, 필요한 것을 얻었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작게 부딪치는 식기 소리가 전부인 식사 시간이 간신히 끝나고, 우아하게 냅킨으로 입술에 살짝 묻은 기름기를 가벼히 닦아내고 그 동안 식탁을 정돈하자 권태에 시달리는 듯한 짜증 섞인 목소리가 쨍하게 귓가에 들려왔다.

 


"그래서, 언제 죽어주실건가요? 이 개같은 소꿉놀이를 언제까지 하자는겁니까. 설마, 이제와서 죽는게 무서워지시기라도 하셨나요?"


"억측은 관둬라. 괜한 감정소모도. 하등 네게 이로울 것 없어."


"한번 뒈져봤잖아. 어차피 이번에도 다시 되살아날텐데 기약 없던 이전보단 훨씬 낫지 않습니까? 댁도 이미 좆된 게임판 따위 초기화 하고 싶을텐데 그럼 뭘 망설이시는겁니까?"


"약속하지. 오늘이 끝나기 전에 회귀는 이루어 질 것이다."

 


바라던 것이 손에 들어오지 않자 신경질적인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오직 이 목표만을 가지고 이미 오래전에 멸망한 그의 세계에서 버티고 또 버텨왔던 것일터. 가뜩이나 아슬아슬해진 그의 신경은 끊어지기 직전이라 인내의 끈은 덧없이 짧았다. 이런 상태로 그는 회귀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제 확답에 간신히 이성을 붙든채 딱 하루의 유예를 받아들이기로 한건지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순순히 따르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돈해주고 새 옷을 갈아입히자 제대로 된 식사와 단장을 끝내니 그나마 살아있는 꼴을 갖추어왔다. 식사를 끝낸뒤 와인병을 꺼내왔다. 마력으로 담근 술인 만큼 보존력도 뛰어난 것에 더해 효과도 뛰어날 것이었다.


멸망하기 이전의 세계처럼 평범한 오찬이나 석찬 시간을 가지는 것 처럼 와인잔을 채우자 조심성 없이 들이켜왔다. 쓸데없는 잡담을 주고받곤 했지만 이전에는 조금 즐거웠던 시간이었을터인데 차 한잔의 여유를 가지던 때도 어느덧 아득한 옛 일이었다.

 


"너무 급하게 들이키는거 아닌가."


"신성력이나 마력은 폼인줄 아시나. 댁 만큼은 아니어도 나름 영웅급 마력은 있거든요. 게다가 어차피 저는 안 서도 상관 없잖아요."


"..이왕이면, 나쁘진 않은 기억이 낫지 않겠나."


"몸 요구한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네요. 뭐라 하든 별로 상관 없지만. 까짓거 맞춰드리죠. 애인처럼 굴어드려요? 네? 호칭은 뭐가 좋을까요? 자기야?"


"괜한 짓은 되었다."


"..사랑해요."

 


그가 멋대로 장단을 맞추려 들기 무섭게 손바닥을 뒤집듯 태도가 바뀌었다. 살포시 몸을 기대어오며 언제 날을 세웠는지 모를 정도로 사르르 녹은 표정에 애정을 담뿍 담은 눈가가 곱게 휘어지고 귓가에 간질간질하게 속삭이는 목소리는 사랑을 닮아 한없이 달콤하기 그지 없었다.


언뜻 진심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의 태도에 잠시 넋을 잃자, 순식간에 흐려지는 눈동자에 비로서 착각을 정정할 수 있었다. 텅 빈 가슴을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그가 제대로 된 사랑을 품을 수 있을리가 만무했다. 스스로의 아둔함을 비웃으며 침대로 이끌자 약속한 것을 내주려는듯 곧장 단추를 풀려들기에 스스로 옷가지를 벗으려드는 손을 그대로 잡아끌어 목에 걸게 한채 침대 머리 맡에 그간 시간이 빌때마다 틈틈이 만들어 낸 것을 걸어왔다.


제대로 잠들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날의 악몽에 시달리기 때문이겠지. 한순간의 위안이겠지만, 그것 조차 간절할 그에게 마지막 밤만은 평온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백색의 깃털이 살랑이는 드림캐쳐를 걸어주자 깜빡이는 흑요석 같은 눈동자가 두 눈 가득 그것을 담아왔다.


의미를 곱씹는 것인지, 단지 자신이 행동을 멈추고 몰두하는 행위를 담는 것인지는 모호했다. 실은 이런 행위조차도 자기 만족에 불과할 뿐이겠지만, 드림캐쳐를 걸어준뒤 그의 뺨을 쓸어내리자 아닌듯 하면서도 그간 온기가 그리웠는지 은근히 제 품을 파고들어왔다.


다시 한번 맞부딪치는 입술 사이로 점막이 부딪치며 질척하게 살이 섞이는 소리가 방안에 울려왔다. 몸을 더듬자 예민한 살결에 닿는 타인의 온도에 달아올라 살짝 떨어진 입새로 작게 새어나오는 비음이 끈적하게 귓가에 울렸다.


흥분으로 인해 혈류의 순환이 빨라지고 그리고 서서히 약 기운이 퍼지는 것 같았다. 달아오른 몸이 뒤늦께 둔해졌다는 것을, 몽롱해지는 정신이 단순히 성감으로 인한게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자각한듯 떨리는 손이 제 멱을 틀어쥐었으나, 옷자락만 겨우 구길뿐 제대로 틀어쥐지도 못한채 하얗게 질려왔다. 혹 약물 내성이라도 있을까 마력으로 조금 손봐둔 보람이 있었다. 보유한 신성력으로도 정화하지 못하는 독은 이미 눈치챘을땐 온 몸에 퍼진 후였다.

 


"씨...발, 이 악마새끼야, 뭘..."


"네가 나한테 주었던 것이지. 복제하는데 제법 애를 먹었다만 충분히 감수할 만 했어. 잠이 들듯 눈이 감긴 후에는 더는 아무 고통도 느끼지 못하게 될 것이다."


"개새... 하, 생일빵 한번... 화려하..네..요."

 


어차피 모든 것이 끝난 와중에 뒷통수를 맞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지, 혹은 나를 믿었던 것인지 순순히 약을 탄 음식을 받아먹고는 뒤늦게 이상을 눈치채었다.


약기운이 퍼지자 애써 눈을 감지 않으려 부릅뜨려해도 서서히 눈이 감겨왔다. 저항할 힘 조차 없는듯 잠투정을 부리는 어린 아이를 달래듯 점차 몸에 힘이 빠져 늘어지는 그의 몸을 안아든채 영면에 들기 전, 그의 귓가에 속삭이듯 자장가를 불러주었다.

 


"이제는 집으로 향하는 길이 있으니,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있으니.

달콤한 선잠을 두 눈 가득 고인채, 안심하고 잠들렴.

다시 눈을 뜨면 악몽은 흩어진 이후일테니."


"......"

 


툭 떨구어진 가는 손목이 잠시간의 휴식조차 없이 미친듯이 내달려온 그의 끝을 알려왔다.

 


"잘 자라, 이기영."

 


살짝 흔들어 깨우면 금방이라도 잠에서 깨어날 것 처럼 곱게 두 눈을 감은채 잠든 것 처럼 숨을 거둔 그의 얼굴은 간만에 아주 평온해 보였다. 이제서야 겨우.


흐트러진 옷 매무새를 정돈한뒤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그의 시신을 안아든채 밖으로 향했다.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서 더는 의미 없는 행동이었지만 마력으로 터를 고르고 작게나마 비석을 세워준 후 그가 사랑했던 이들의 비어있는 무덤들에 둘러쌓인채 가운데 그의 몸을 뉘어왔다.


굿나잇 키스를 살짝 입술 위에 닿은채 본래 그 누구보다 성대했어야 했을 그의 장례식을 구색만 겨우 맞춰 조촐하게 끝내고는 흙을 덮어내었다. 그의 영면이 평온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생일 선물 대신 그를 떠오르게 하는 백색의 깃털을 달아 장식한 드림캐쳐를 같이 묻어왔다.


부디 오래도록 달콤한 꿈결에 감싸안겨 있거라. 조금만 기다리면 반드시 여명이 밝아올테니까.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니.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었고 회귀 또한 마찬가지였다. 주신 하나의 존재를 말소하면서 다시금 역사를 개정할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되었다. 그러니 이번 또한 마찬가지겠지. 여기서 희생되는 것은 대륙의 모든 생명체들의 목숨, 대륙의 주신중 하나인 희생과 부활의 신의 신격.

 

 


그리고.

 


"공화국의 주신, 바리안."

 


대륙의 주신은 베니고어였으니 마땅히 그녀를 희생양으로 내모는 것이 순서에 맞았으나 그는 여신조차 제 품에 품었으니, 또한 그녀는 이기영의 행보에 중요한 열쇠이기에 빠져서는 안되었다.

 


"멸국의 위기에도 직무를 유기한채 방관하였으니 마땅히 그 대가를 치뤄야하지 않겠나."

 


공화국 전쟁에서 바리안 신은 침묵하였다. 그를 성심으로 모시던 비숍 사제의 죽음에도 방관했으니 만약 이기영에게 대륙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는 과업이 없었다면 주저없이 제게 칼날을 겨누었던 공화국과 평화로운 협상 따윈 없이 자칫 공화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몰락할뻔했다.


비록 국교가 아닐지언정 자리잡은 국가가 몰락한다면 그곳에서 득세한 종교의 말로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세계의 방관자는 그에 대한 업보를 치루어야했고 머지않아 바리안의 희생을 확답받았다. 지불하는 대가는 이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

[상태창을 확인합니다.]


[이름-진청]

[칭호-책사, 전장위의 현자, 공화국의 오호대장군, 2회차를 다시 시작하는 마법사]

[나이-30]

[성향-계획적인 전술가]

[직업-군단 마도사-전설 등급]

[직업효과- 기초 마법 지식 습득]

[직업효과-중급 마법 지식 습득]

[직업효과-고급 마법 지식 습득]

[직업효과-고급 소환 지식 습득]

[직업효과-고급 마력 운용 지식 습득]

[능력치]

[근력-65]

[민첩-75]

[체력-89]

[지력-99]

[내구-77]

[행운-67]

[마력-97]

.

.

.

 


회귀한 시점을 확인하는 것에는 쓸데없이 부산을 떠는 것 보다 상태창이 더욱 유용했으며 곧바로 보이는 추가된 칭호 하나가 과거로의 귀환을 알려왔다.


상태창에 표기된 나이가 답을 주듯, 막 시작된 게임판을 두고서 눈앞의 털을 부풀리고 있는 겁먹은 뱁새처럼 애써 자신을 숨기고 있는 그의 모습이 중립국 라이오스에서 그와 조우한 상태임을 알려왔다. 지불한 대가로 되돌릴 수 있는 시간은 여기까지인 건가.


약간의 아쉬움도 있었다. 기반은 충분히 쌓여있으니 만약 그가 막 대륙에 발을 들인 시점이었다면 처음부터 함께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이방인들의 이주는 자유로운 편에 속했다. 다만 적대국에 가까운 제국과 공화국간의 이주는 쉽진 않더라도 이제 막 튜토리얼 던전을 벗어난 파릇한 신참 하나정도야 빼돌리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이니. 처음부터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필 이 시점에 떨어진 이상 전부 허상이 되었지만. 그래도 이것 또한 나쁘진 않겠지.


새삼스러운 일이었으나 26살의 이기영은 기억보다 더욱 앳된 모습이었다. 외관은 달라진 것이 없었느나 분위기라던지 그 외의 것들이 눈여겨 본다면 쉽게 눈에 들어왔다. 겁 많은 사기꾼에, 스스로에 대한 확신도 없고, 손에 쥔 것을 잃을까 전전긍긍하며. 아직 미숙하기 짝이 없는. 그리고, 나를 알지 못하는 이기영의 모습.


이 게임의 끝은 이미 정해져있었다. 그 이후의 일들도. 게임의 승부가 채 끝나기도 전 외부의 개입으로 인해 판은 흐지부지 된채 어째서인지 이기영의 옆에 있는 미친 여자가 중력 마법으로 라이오스의 왕성에 테러를 일으키고, 그걸로도 모자라 악마군주를 소환해낼 것이다. 이후에는 그의 사기극으로 인해 악마소환자로 몰리고, 공화국은 오히려 그것을 기회 삼아 전쟁을 일으킨다.


이미 알고있기에 사건 자체를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공적을 만드는 것 외에 대륙을 하나로 모으는 더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을 찾지 못했다. 좀 더 이전 시점이라면 충분한 신뢰관계를 구축해 다른 희생양을 설계할 수도 있었을터지만 지금의 시점에선 괜히 그를 이해한다느니 협조하겠다느니 하는 말은 겁많은 그의 의심만을 살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대로 흘러가는대로 놔둬서야 기껏 지금 이 시점으로 돌아온 의미가 없었다. 이대로 손을 놓아도 당분간의 흐름은 무난하겠지만 좀 더 수월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그에게 충분히 토대를 세워줘야했다. 한정된 시간, 그리고 게임이라는 제약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할 수 있는 것들은 엄연히 존재했기에 게임판 위에 보여줄 수 있는 전술은 전부 눌러담아 내보여왔다.


아직 성장하지 못한 그에게는 버겁기 그지 없겠으나 머지 않아 제것으로 삼킬 수 있을터. 그가 시선을 내려 게임판에 집중하는 사이 시선을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엇나간 시선사이로 지금 그의 모습을, 사소한 동작까지도 전부, 빠짐없이 이 두 눈에 새겼다.


그의 손이 말을 옮겨왔다. 아무 의미 없는 수들이었지만 그 모든 것을 아로새겨왔다. 지금과 같은 여유는 당분간 없을테니. 막 또다시 말을 옮기려는 순간, 초대받지 않은 예정된 불청객이 찾아왔다.


발렌틴의 돌발 행동으로 다소 날이 선 분위기가 만들어졌으나 아직 이쪽 진영에 있는 이기영과 차희라에게 빚을 지운 샤오린에 의해 차희라가 교국의 병력들과 함께 판을 뒤엎는 것으로 소강상태에 이르렀다. 아쉬움을 뒤로 한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쉽게 되었군요."


"공교롭게도, 더는 게임을 즐길 상황이 아니니까요."


"다음에는 부디 느긋하게 즐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눈 앞의 겁 많은 어린애는 바로 직전까지 손가락을 잘릴뻔한 위기를 겪었던 만큼 긴장으로 손에 땀이 찰 법도 하건만 맞잡은 손은 차갑게 식지도, 축축하지도 않았다. 물론 고작 그정도도 숨기지 못했다면 진작 그의 속임수를 눈치챘을 것이지만.


소강 상태에 접어든 것에 더해 더는 저 정신나간 여자와 엮이고 싶지조차 않았지만, 정해진 대로 미친 마법사에게 호의를 보낸뒤 그리고.

 


[골든 슬럼버 -전설등급]


[멸망한 세계의 마도사가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연심과 연민을 담아 만든 드림캐쳐입니다. 저주 저항력이 상승합니다. 수면시 자연 회복속도를 증가시켜줍니다. 부가효과로 악몽으로부터 사용자를 지켜줍니다.]

 


사라진 역사와 함께 소멸했으리라 생각한 그의 날개와 백색의 깃털을 달아 만든 드림 캐쳐 하나가 손에 남아있었다. 그 세계의 물건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좀 더 신경써서 짐을 챙겼을텐데, 그나마 이것이 남아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녀에게 자신의 시선이 간 것을 경계하던 그에게 이어 발걸음을 옮기자 금방이라도 털을 부풀릿듯 그의 신경이 곤두서는게 눈에 보였다. 하지만 그가 우려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탄일을 축하드립니다. 이기영 명예 추기경님."


"...네?"

 


갑작스러운 영문 모를 소리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건내는 선물을 거절 못한채 얼떨결에 받아들였다. 중립국 라이오스를 방문한 시기는 그의 탄신일과 거리가 멀었지만 내게는 아직 그의 생일이었다. 멸망한 세계에서부터 줄곳.


끝내 그의 손에 들려진 드림캐쳐를 보며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의미모를 선물, 그것도 갑작스러운 조우에도 미리 준비된듯 내미는 것에 더해 날이 맞지 않는 생일 선물이라는 것에 수상함을 느꼈는지 본인은 물론, 저 미친 마법사에게도 보이며 이리저리 살펴봤지만 그가 경계할만한 다른 장치가 되어있을리 만무했다. 그가 제 아무리 머리를 굴려본들 의미를 알 수 없겠지만 딱히 몰라도 상관 없는 일이었다.

 

 

*

라이오스에 그 미친여자가 이전과 마찬가지로 또다시 테러를 자행했다. 대체 무엇이 그녀의 발작 버튼을 누른 것인지 아직까지도 미지수였지만 중요한건 고작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하마터면 회귀 직후 사망할 뻔한 위기를 겨우 넘기고서 다시 그녀의 마법을 면밀히 살펴보았지만 재차 조사했음에도 불구하고 굴욕적이게도 그녀의 마법의 원리를 완전히 파악할 수 없었다.


분명 준비할 시간은 많지 않았을터인데 그녀 혼자서, 많아봐야 붙어 있던 흑마법사 정도의 도움을 받은게 전부인데 비록 전선을 유지하느라 꾸준히 손실이 있었다 할지라도 진을 친채 뛰어난 마도왕국과 공화국의 마법사들과 한참을 걸려 함께 설치해낸 마법과 같은 급인 이적을 행한 것으로도 모자라 악마군주를 소환할 여유가 있었다는 사실은 같은 마법사로서 제법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그때는 학식과 견해가 짧아 두 마법의 발현자를 동일인의 소행이 아니라고 판단을 내렸지만, 라이오스에 중력 마법을 떨어트린 것도, 기존에 존재하는 마법적인 매커니즘을 뛰어넘는 독특한 방식의 마법 결계도, 그리고 악마군주의 소환까지 전부 그녀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았다.


고작 대륙 1년차의 마법사가 초기 소환된 마법사보다도, 평생을 대륙에서 마법을 익힌 이들조차 발끝에 이르지 못한 경지에 가뿐히 올라서있었다는 것을 그 누가 알았을까.


공화국 전쟁때 떨어트린 메테오는 그녀의 마법과 표면적으로는 비슷했으나 엄연히 원리가 전혀 달랐다. 그나마 위력만을 재현했으나 물리력이 주류인 운석 충돌과 달리 그 미친 마법사가 떨어트린 것은 일종의 블랙홀이었다. 그 현장을 조사해본 이들이라면 두 마법의 차이를 머지 않아 알아낼 것이었다.


흑마법의 흔적을 따라 해변으로 향했다. 교국의 무녀의 술식을 익힐 기회라도 있었던 것인듯 일반적인 마법과도 주술과도 결이 다른 수준 높은 마법 결계를 해제하자 공동 안에 봉인된 악마가 위협적으로 자리해왔다. 그는 저런 것을 잘도 포섭했다. 이 시점엔 녀석은 아직 사기꾼에 불과했지만 적어도 그 수완만은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저... 정말로 당신이었습니까?"

 


봉인된 악마들을 사이에 두고 조우하자 한껏 마력을 밀어 넣어 어두운 공동 안에서도 선명히 보이는 그의 얼울위에 토끼같은 눈망울이 순진하게 흔들려왔다. 전부 거짓이고 기만이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문득 속아넘어갈 것 같은 수준급의 연기였다.


그런 그의 모습에 순간 그렇다고 답해버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지만 이내 그 생각은 접어야 했다. 눈앞의 그가 꽤나 볼만한 얼굴이 되는 것은 좋지만 유감스럽게도 주변에 있는 이들이 걸렸다. 제아무리 공화국이 교국과 달리 흑마법에 관대하다 한들 악마와의 계약은 전혀 이야기가 달랐기에 어처구니 없게도 이곳에서 악마 소환사로 몰려 몰락한다면 도리어 그가 후에 도모해야할 길 조차 방해될것이었다.


외통수였다. 익숙하지도 않고 유쾌하지도 않은 상황에 미간을 찌푸리기 무섭게 몰아치듯 봉인된 악마들이 깨어났다. 이쪽이 그들을 공격한다면 측근들의 오해를 심화시키는 것에 더해 애초에 불가능하기도 했다. 적어도 신화급의 존재가 마력의 발현을 방해하고 있었다. 검은 장막은 이쪽을 언뜻 보호하는 것 처럼 보였지만 마력의 흐름을 죄다 꼬아놓아 마법을 사용할 수 없었다.


물론 이쪽은 물리력 또한 갖추었지만 그뿐, 마법의 도움 없이 주변에 잔재중인 다른 악마의 하수인들을 뚫고 저들에게 닿을 길이 없었다. 닿는다 한다면 위기에 내몰린 그가 어떤 돌발 행동을 할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주사위를 던지기엔 디메리트가 더욱 컸다.


진실을 밝히려는 것 또한 불가능. 이미 여신의 손거울을 통해 이 상황이 퍼져나갔을터고 혹여 저들을 죽이는데 성공했다 한들 교국의 명예추기경이 라이오스에서 흑마법으로 악마 군주를 소환해놓고는 대대적으로 병력을 움직인 것도 아니고 은밀히 움직인 비공식 조사단 몇명에게 어처구니 없이 죽었다? 오히려 교국은 물론 다른 국가들의 의심 또한 받게 될 것이다.


굳이 외교적 문제로까지 가지 않는다 한들 머지 않아 들이닥칠 차희라가 마찬가지로 이쪽의 숨통을 끊어낼 수도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그녀에겐 이쪽이 전에 그를 위협했다는 심증이 있었기에 인내의 끈이 더욱 가늘어졌을게 자명했기에 더더욱 거리낌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더더욱 대륙은 파멸의 길에 한 발짝 더 가까워지겠지.


깨어난 악마들과 그들이 맞부딪친다. 지휘를 받지 못한 제 부관들은 혼란스러운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 우리를 건들지는 않았으나 섣불리 움직인다면 표적이 될까 경계하는 것 반, 나를 의심하며 흘끗거리며 눈치를 보는 이들이 반이었다.


이도 저도 못하는 사이 악마군주가 라이오스에 검은 마력의 응결체를 추락시켰다. 도시를 보호하는 마법은 저 폭탄과도 같은 마력을 버텨내지 못할 것이다. 금방 균열이 가고, 결국 깨져버린 마법 보호막에 도시의 이들의 얼굴에 절망이 드리웠다.


미친 마법사과 녀석이 손을 잡았다. 그녀의 검붉은 마력이 빛의 띄며 추락하는 검은 마력으로부터 도시를 보호했다. 처절하게 악마들과 맞서 싸우며 피를 토하고 마력은 물론, 생명력까지 끌어다 쓰는듯 안색이 점차 파리해졌다. 이쯤된다면 연기조차 아니었다.

 


"..하, 이 망할 놈."

 


악마군주의 역소환과 직후 이곳을 찾은 교국과 공화국 진영의 병력이 도달했다. 당장이라도 공화국 전쟁 모의전이 시작될 기세의 팽팽한 대치 상황에 발걸음을 늦출 여유따위는 없었지만 기여코 쓰러지고 마는 그의 모습이 보이자 저절로 탄식이 터져나왔다.


미래를 본다는 소문이 있건데 혹 그탓인지 어째서인지 이쪽을 도왔던 카스가노 유노의 도움으로 이번에도 어렵사리 그곳을 빠져나간뒤 자신을 의심하는 이들과 그래도 믿고싶어하는 이들에게 다시 한번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공화국 전쟁으로 이어졌다.


마도왕국과 공화국의 마법사들이 심혈을 기울여 내리꽂은 준신화급 마법이 빛과 함께 산화되었다. 비릿한 피와 찐득한 땀냄새, 그리고 시체 냄새와 그을린 대지의 매캐한 냄새가 지저분하게 뒤엉킨 가운데 유일하게 아름다운 광경에 넋을 잃는 것도 잠시, 이내 몰려든 언데드들에 경악과 두려움이 전장에 일어왔다.


전의를 잃은 병사들은 더이상 의미도 알지 못한채 검을 들거나, 그조차도 하지 못한채 눈 먼 화살에 맞아 무의미하게 목숨이 소모된다. 전쟁의 본질이란 본래 그런 것이다. 제 아무리 거창하고 그럴듯하게 대의를 포장한다 한들 결국은 생명을 가지고 게임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개인은 그 위에서 인생도, 그 모든 것이 잘려나간채 수치화된 체스말이 되어 그저 명령대로 움직이고 살기 위해 무기를 휘두를뿐. 혹여 품은 숭고한 뜻이 있을지언정 그 끝은 보잘것 없는 죽음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허망한 죽음 조차도 아무것도 아닌 서류위의 활자 몇글자가 될 뿐.


물밀듯이 밀려오는 언데드들의 모습에 절망한 병사가 검을 떨어트렸다. 신이시여, 정녕 저희를 버리시나이까. 신이 실존하는 이세계에서 그들을 향해 목놓아 부르짖으며 비명과도 같은 절규를 내지르며 어둠에 잠식당해갔다.


그리고 그 순간, 목소리를 들은듯 절망의 가운데 한줄기 빛이 퍼져나갔다. 고통과 혼란이 혼재한 전장위에 다이야몬드를 흩뿌린 것 처럼 안개처럼 퍼져나가는 빛무리와 함께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고결한 성자가 신성력의 광휘를 휘감은채 허공에 부유해왔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보이는 그의 모습은 여신의 강림 그 자체였다.

 


"엘룬의 아들딸들이여, 바리안의 아들딸들이여..."

 


신을 사칭하는 그가 결국 스스로 신격을 얻게 된다는 것을, 그가 내뱉은 기만과 거짓들이 진실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채 무대 위의 배우마냥 연기를 해왔다. 그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 즐거웠다. 저 위에서 자신을 밑바닥에 처박을 것을 알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쿨럭."

 


마도왕국의 도움에 더해 전선의 마법사들의 마력을 모았다한들 준신화급 마법의 출력을 감당하느라 마력은 물론, 생명력까지 끌어다 쓴 부작용인지 울컥 비릿한 쇠냄새가 역하게 올라왔다. 이미 머리칼은 굳이 보지 않아도 완전히 하얗게 새어버리지 않았을까.


모두가 거짓된 빛의 신의 강림에 시선을 빼앗긴 사이 지휘부에 들이닥친 것은 교국의 연합군도 아닌 공화국의 병력들이었다. 마력탈진에 시달리느라 무력화된 마법사를 붙잡는데에는 과한 병력이었다. 제아무리 중요한 타켓이라 한들 자신이 내린 명령이었다면 이렇게 인력낭비를 하진 않았을터지만 저중에는 단지 전범으로서 처형당할 것이 두려워 조금이라도 공을 세워 선처를 받고자 하는 이들 또한 적잖이 존재할 것이다.

 


"이 악마새끼!"


"우린 속은거야...! 전부, 전부 네놈에게...! 네놈 때문에!"


"악마 소환사에게 빛의 철퇴를!"


"신이시여, 저희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부디 자비를..."

 


그 두려움과 원망을 표출하려는 것 마냥 우왁스러운 손길이 불필요한 폭력을 휘둘러왔다. 온 몸이 포박되고 광기와 광신 사이의 미묘한 경계에 있는 이들은 자신이 완전히 무력화된 이후에도 거친 손속을 감출 생각이 없어보였다.

 


"나는, 악마 소환사가 아니다. 공화국의 군사, 진청이다!"

 


그들에게 연행되어가면서 피를 토하며 외쳐왔다. 모두가 믿지 않는 진실이건만 오직 그만은 알고있을터. 다른 우민들이 아닌 이기영, 바로 네게 하는 말이다. 두 눈에 핏발이 선듯 눈시울이 뜨거웠다.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에 부유하는 여신의 손거울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위에 비치는 그의 모습을 마지막인 것 처럼, 찰나의 깜빡임 조차 아까워 한순간도 놓치지 않기 위해. 너만은 알고 있다고 통한의 외침을 내질러왔다. 이 목소리는 네게 닿았을까. 무정하고 불공정한 신들 대신 그의 이름을 부르짖었으나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

고통에 찬 비명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가장 깊은 지하감옥은 습기 찬 공기가 눅눅하다 못해 묵직하게까지 느껴져왔다. 어쩌면 이곳에서 명을 다한 이들의 원한어린 사념이 잔존하는 탓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신이 실존하는 세계이고 저주가 형태를 이루는 세상이니 특별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교국이 자랑하는 이단 심문관들의 손에서 고문에 대한 교과서가 있다면 거기에 실릴 수 있을 정도로 매일같이 행해지는 다양한 고문들로 인해 박살난 스탯은 쌓아올렸던 명예와 함께 나락에 처박혔다.


그는 진실을 알고 있다. 우습게도, 그 사실이 이전보다 지금 상황을 좀 더 견딜 수 있게 해주었다. 또한 결국 누명은 풀릴 것이라는게 작은 위안이었다. 제 부관들에게도 마지막으로 괜한 짓은 하지 말라 일러두었으나 얼마나 소용이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헛되이 목숨을 소모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으나 만일 행동한다면 그들은 또다시 악마들에게 손을 내밀어버리겠지.


그 사실만은 조금 씁쓸했다. 차라리 내 명예를 더럽히지 말라 경고를 할걸 그랬나. 너희들 손으로 나를 악마 관계자로 만들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다면 저들이 조금이라도 악마와 손을 잡는 일을 재고할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저들은 결국 죄책감에 시달리면서도 나의, 그리고 본인들의 복수를 위해서라도 모든 것을 포기했겠지. 비록 그들의 행동으로 인해 그들의 무덤 조차 만들어 줄 수 없게 될지라도.


그래도 이전회차에서는 그의 무덤은 만들어 줄 수 있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아무 의미 없지만, 비어있는 무덤이나마 비석과 함께 그의 동료들의 무덤을 함께 만들어 주었던게 조금쯤은 위안이 되었을까.


다가올 죽음을 기다리며 과거의 무덤을 떠올리는 것 만큼이나 우스운 행동이 또 있을까. 자신의 무덤은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되살아날것이기에 필요조차 없겠지만 한편으로는 어쩌면 그가 그의 가슴에 제 동료들의 무덤을 만들어 가슴에 묻었던 것 처럼 작게나마 제 무덤도 마음 한구석에 만들어주지 않았을까. 작은 바람을 품어보았다. 그에게 새털만큼의 양심이라도 존재한다면 녀석의 양심에 박힌 작은 가시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핏물을 뚝뚝 흘리며 실실 입꼬리를 올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실성한 악귀처럼 보이겠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기괴한 꼴을 보는 이는 없었다. 아직 고문관들이 들이닥칠 시간이 되지 않은 이곳은 고독으로 가득 차있었다. 신을 배반한 이들의 말로는 고독과 고통뿐이라는 광신도들의 뜻일터.


영원과도 같은 고문과 고독의 반복 끝에 시간의 흐름조차 모호한 단절된 공간이 굳게 닫긴 마력석의 잠금이 열리며 함께 모습을 들어내는 그는 어둠속을 가르는 한줄기 빛과 같았다. 그가 제 몸의 구속구를 풀어내자, 망가진 몸이 비틀거리며 바닥에 힘없이 추락해왔다.

 


"..이기영...!"

 


동시에 이번생의 마지막을 직감하고 그에게 조금이라도 닿기 위해 손을 뻗자 겁 많은 그는 저를 향한 손길을 위협이라 받아들인듯 반격해왔다. 눈에 다 보이는 느릿한 동작이건만 그보다 더 형편없이 느려진 몸은 최소한의 방어동작조차 취하지 못한채 고스란히 충격을 감내해야 했다.


쿨럭, 마른 기침과 함께 울컥 피가 쏟아져내렸다. 내상을 입은듯 했지만 머지않아 생을 다할 육신이었기에 크게 신경쓰이지는 않았다. 본래라면 스탯의 차이로 인해 유효타가 성립되지 않았겠지만 박살난 몸과 함께 수직 하강한 스탯은 그가 자신의 몸에 물리적인 흔적을 남기도록 허락해왔고 이것은 꽤나 색다른 경험이었다.

 


"..오랜, 만입니다."

 


패배한 정적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것으로는 도무지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그의 두 눈에는 호의에 더불어 연민과 약간의 죄책감이 비추었다. 능숙하게 가면을 쓰는 연기자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표정을 숨기는게 서툴러서야.

 


"제가 여기 몸소 온 것은 몇가지 제안할게 있어입니다. 물론 그 내용은 당신에게도 썩 나쁘진 않을겁니다."


"...패배자에게 썩 다정하군."

 


고작 한마디에 그의 표정에 금이 가며 작게 벌어진 입술이 벙긋거려왔다. 제 귀를 의심하며 눈꼬리가 씰룩이며 동요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모습이 역시 어리긴 어리군. 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지자 그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이어지는 그의 제안은 익숙한 것이었다. 그의 감시하에서 생을 연명할 것인가, 바닥에 처박힌 명예를 되찾는 대신 숨을 거둘 것인가.

 


"삶입니까 명예입니까. 아니면 이런 개자식과의 거래는 받아들이지 않으시겠습니까."

 


정해진 질문, 마찬가지로 그 답은 이미 정해져있었다.

 


"명예. 나는 명예를 택하겠다."

 


본인이 준 선택지건만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 그러나 그는 결국 제 선택을 따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다시 보도록 하지."


"유감스럽게도 군사님의 바람과 달리 그럴 일은 없을겁니다. 당신의 선택대로 군사님께서는 여기서 지옥에 떨어질거거든."

 


아니, 우리는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

"...이기영."

 


기나긴 기다림 끝에 다시 눈을 떴다. 존재의 자각과 함께 스스로의 이름보다 더 먼저 그의 이름을 부르며 아무것도 없는 장소에서 홀로, 유일하게 남겨진 게임판을 몇번이나 홀로 다루면서. 그렇게 또다시 계속 그를 기다려왔다.

 


"결국은, 이렇게 되었지 않았나."

 


게임 판을 앞에 두고서 우리는 다시 만났다. 다시 직접 마주한 그의 전술은 기억속의 지금과 조금 달라져있었다. 좀 더 완성되어있고, 은근히 자신의 흔적이 보였다. 그 사실에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조금 더 재미있는 게임이었다. 이전회차보다. 그리고 이어, 그의 역린을 건들였다.

 


"내가, 잃을 것 같아...? 내가 또...!"

 


단 하나도 잃지 못해 스러지고 무너지려고 한다. 그때와 같이. 눈물샘의 통제를 잃은듯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발작적으로 외치는 모습은 썩 상태가 좋아보이지 않았다. 연심 숨을 삼키며 제 감정은 물론, 몸 조차 통제하지 못하는 모습.

 


"..잠시 휴식이 필요한가?"

 


그는 제 배려를 받는 대신 혼자서 천천히 숨을 골라왔다. 그리고 털을 한껏 부풀린채 이곳이 2회차임을 밝히며 실패해도 재시작하면 그만이라 블러핑을 해왔다. 아니, 너는 그걸 견딜 수 없어. 차마 꺼내지 못한 말을 다문채 1회차의 일을 물어왔다. 이번에는 좀 더 상세히.

 


"군사님은 제 노예셨습니다. 가구처럼 사용되기도 하고, 제가 기분나쁠때 스트레스 해소용 샌드백이 되어주시기도 했죠. 정말 개처럼 허겁지겁 제가 준..."


"허튼소리."


"아니, 진짜라니까 그러네. 보이는 것을 그대로 말해주니까...! 이럴거면 대체 왜 물으신겁니까?"

 


시덥지도 않은 헛소리. 하지만 고작 이런걸 그렇게도 고대해왔다. 그러니 이제는 마땅히 약속한 것을 받아내야 할 차례였다. 그밖에도 녀석에게서 받아내야 할 것은 많았지만, 우선은.

 


"약속을 지켜라."


"대륙 최고의 명예 컨설턴트의 명예를 걸고, 반드시 군사님의 이미지를 살려드리겠습니다."

 


재잘거리며 잘도 떠들지...

 


"그러니,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확실하게 처리해드리겠습니다."


"허튼 수작 부리지 마라! 이상한 짓을 했다가는 가만 있지 않겠다. 경고했다. 이기영. 제대로된 상의 후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을 사용해."


"분명 만족하실겁니다. 하얀아, 소라씨."


"이기영!!"

 


만류하려 했으나 귓등으로도 듣지 않아 놈의 행동이 먼저였다. 젠장. 기껏 깔린 판을 망칠 만큼 멍청하지는 않기에 결국은 또 똑같이 끌려갈 수 밖에 없었다. 우습지도 않은 연극판이 깔리고 연출된 화면에 타인들은 어처구니 없게도 진심으로 감명받는다.

 


"눈을 뜨세요. 군사님! 당신이라면 이겨낼 수 있습니다."


"..나는 공화국의 군사, 진청이란 말이다...!"


"...네. 흐윽, 당신은. 더는 악마 소환사가 아닙니다. 명예로운, 공화국의 군사. 그림자의 영웅이신 진청님이십니다...!"

 


최후의 발악을 했지만 이미 놈이 만든 분위기는 기울어진지 오래였다. 제기랄, 화면 너머의 구경이나 하는 저자식들도 전부 이기영과 한통속으로 보였다. 인류를 하나로 만들겠다니 기여코 손을 잡고 나를 궁지로 내몰아. 이상한 칭호로 나를 제단하고 멋대로 프레임을 씌우는 꼴이 웃기지도 않았다. 나는 광대나 보기 좋은 상징물 따위가 아니란 말이다...!

 


"그림자의 영웅...!"


"믿고 있었습니다! 그림자의 영웅이시여...!"

 


망할.


이것 만은 바꾸려 했건만 결국 또 이렇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저 망할 녀석은 제 명예를 회복해준다고 해놓고 밖에 고개도 못 들고 다니게 할 작정이었던 것일까. 따지려고 해도 놈은 이미 없었다. 다짜고짜 사람들을 무대 위로 떠미는 만행이나 저지르며 일은 일대로 전부 벌여놓은 주제에.

 


"..도망이라도 친건가. 제대로 된 인사조차 없이 멋대로 가버렸군."

 


한참 수치에 시달려 경향이 없을터인데 조혜진의 연기실력은 기만과 속임수와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성격과 달리 답지 않게 수준급이었으나 이미 연극이라면 따라올 자가 없는 그의 블러핑에 익숙해진터라 이미 떠난 이기영을 대신해 그녀가 연기하고 있다는 것이 눈에 보였다. 녀석이 돌아오면 제일 먼저 한대 쥐어박아야 성이 찰 것 같았다.


다시금 화면이 바뀌었다. 콧노래를 부르며 영면을 취하는 육신을 욕망어린 손길을 대는 이의 모습에 제 아무리 다시 원상태로 돌아올 것임을 알아도 시신을 함부로 다루는 모습은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기본적인 존엄성을 해쳐가면서, 그렇게까지 해야만 그는 겨우 돌아올 수 있었기에.


신의 육체를 탐한 이는 악마조차 아닌 괴물이 되어 타락했다. 일말의 인간성조차 잃은 모습 그대로 날뛴 끝에 검사는 결국 친우를 구하지 못해 희생을 택해버렸다. 그가 가장 원치 않은 결말에 결국 돌아왔으나 그렇게까지 한 의미를 잃어버린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채 발버둥 치다가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라, 알타누스의 회귀자여. 그리하면 내가 네게 미래를 선물할지어니...!

 


목 놓아 흐느끼면서, 애원과 기도에 가까운 그의 외침과 함께 빛이 내리꽂혔다. 빛으로 산화되었던 이가 재생되었고 이로서 생의 무대 밖으로 퇴장했던 사자들이 모두 돌아왔다. 무사히 첫번째 막이 올랐으니 박수라도 쳐야 할까. 허나 화환을 던지며 기뻐하기는 일렀다. 이제야 비로서, 다시 시작점에 이른 것이었다.


누명을 쓰고 죽기전 따로 준비해둔 것에 더해 대륙의 관리자가 그 위치로부터 얻을 수 있는 정보들을 필멸자들에게 전달하는 것은 일종의 치트로 시스템의 제지를 받지만 회귀자가 회귀의 지식을 이용하는 것은 시스템이 허락하는 범위 내였다.


기억하고 있는 두더지 성녀 던전의 도안을 다시 그린채 몇번이나 그곳에서의 전투를 복기해보았다. 네임드 몬스터들의 공략 방법, 진입 루트, 공략 순서, 병력의 배치까지 전부. 시간이 날때마다 모조리 그날의 패배를 뼈에 새겨지도록 반복해서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또 돌리면서 다가올 그날을 준비해왔다.


두더지 던전의 실마리를 찾으러 떠날 녀석에게 내가 알고 있으니 가지 말라고 붙잡고 싶었지만 그는 분명 필연적으로 상세한 정보를 요구할테고, 진실을 말해준다면 최악의 미래에 녀석은 분명 흔들릴 것이었다. 고작 하나를 못 잃어서 이성을 잃었는데 전부를 잃었다는 것을 견딜 수 있을리가 없었다. 그때도 가까스로, 다 무너져 내리던 것을 독기로 그저 버텼던 것 뿐이었다.


그렇게 두더지 성녀 던전의 실마리를 찾으러 갔다는 녀석은 꼬질꼬질한 꼴로 잘도 돌아왔다. 저절로 이마를 탁 치게 만드는 몰골에 기가 차서 말도 안나왔다. 그와중에 공화국의 도시 하나를 잘도 해먹었다. 넘어온 서류를 검토하자니 심지어 이전보다 더 피해가 큰 것 같았다. 저렇게 불쌍한 꼴로 있으면 자신이 잔소리를 못 퍼부울줄 아는 것인가.

 


"...쯧. 몸을 좀 아껴라. 제발."

 


이어지는 재판에서도 녀석이 잘도 나를 물먹일 것을 알고 있었으나 모든 수는 안다고 대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재앙과도 같은 미친 여자와 힘만 쎈 무식한 놈이 그래왔다.


공화국은 궁수나 레인저직군의 수준이 조금 부족했다. 라이오스에서도 흑마력의 기운이 남아있고, 자신이 거기에 대한 지식이 충분했기에 흔적을 밟을 수 있었던 것이지 공화국의 궁수나 레인저들로는 그 흔적을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물론 그곳은 워낙 철저하게 흔적이 지워졌기에 에베리아의 숙달된 엘프들 수준에서나 추적이 가능했지만.


알고 있다고 한들, 그리고 범인이 예상이 간다 한들 그 증거를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마력조차 사용하지 않았으니 그런 놈의 흔적을 무슨 재주로 잡아낼까. 은근 불법적인 곳에 손이 닿아있던데 그탓인지, 대체 언제 그딴 재주는 잘만 익혀온 것인지 그 힘만 쎈 무식한 놈과는 생각할수록 더욱 상성이 안맞는 것 같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혹여 꼬투리를 잡았다 한들 놈은 물리적으로 입막음을 시도했으면 시도했을 터였다.


그리고 다시금, 모든 것을 집어삼킨 두더지 던전의 문이 열렸다. 시작은 무난한 것을 넘어 지루할 정도로 순조로웠고 그에 따라 서서히 병력들 사이에서도 방심과 교만이 차올랐다. 이곳에 들어온 병력은 천사의 탈을 쓴 악마들도 몰아낸 현존하는 대륙의 최강자들의 총 집합체가 아닌가. 외부의 위협을 무사히 막아내었으니 그 승리에 취한 직후라 내부의 위험은 과소평가되기 마련이었다.


진군 속도를 높히고 빠듯하게 고삐를 조여왔지만 고작 그걸로는 한계가 있었다. 이전보다 더욱 준비된 것도 많고, 강박증에 가까울 정도로 주의를 기울였으나 일부 부관들 사이에서는 과한 걱정과 유난으로 취급하는 분위기가 은근 나돌았다.


연속된 승리에 취해, 외부의 적을 물리친 긍지에 찬 이들은 자신감이 넘치고 위풍당당했다. 겁먹고 웅크리는 것 보다는 낫지만, 완전히 좋은 상황 또한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자신감과 자만심은 한끗 차이기에. 그리고 녀석은 초대장을 손에 넣었고, 내게 상담해왔다.

 


-돌아와야한다. 반드시.


--갑자기 무슨 헛소린가요? 제가 어디 영영 떠나기라도 하나...


-허튼 소리 말고, 허튼 생각은 더더욱 말고.


--잊으셨나본데, 저희 내기중이거든요? 쓸데없는 훈수 두실 여유가 있으실려나?


-쓸데없는 소리가 아니다. 그리고 내가 정확히 1,000포인트 앞서있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허 참. 아직 게임 안끝났거든요.

 


그는 결국 초대장을 사용했다.


던전에서 일어나는 이변, 점차 이어지는 역사의 개변에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 누가 있는지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쓰린 속에 그가 보급품으로 보내 온 럼주를 들이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될 것을 염두해두고 보낸 것인지.

 


"이번에는 약속을 지켜라... 꼭..."

 

 

*

알타누스 성녀의 배웅을 끝으로 그렇게 파티는 끝이 났다. 초대장은 더는 의미를 가지지 못한채 빛으로 산화되고 빨려들어가듯 채 손을 뻗기도 전에 어딘가로 휘말려들어갔다.


과거에서 다시 미래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현재와 과거가 교차하며 분리되어 허구로 소멸해버린 회차들이 뒤엉켜왔다. 허밍처럼 귓가에 울리는 낯익은 선율이 부유하는 의식과 함께 기억이 범람한다. 눈 앞이 어른거렸다. 선명한 금빛이 너울거리며, 달콤한 꿈결을 거늘이는 것 처럼 정신이 몽롱해졌다. 금방이라도, 낮잠에 빠져들 것 처럼.


제대로 땅을 딪고 있는지 조차 모호해 아직도 꿈결을 헤매는듯 비틀거리며 겨우 한걸음 내딪었지만 여전히 시야가 흐릿했다. 소란스러운 주변, 먹먹한 귀에 알 수 없는 소리가 웅웅 울려왔다. 떠오른 상실의 기억과 함께 황금빛 낮잠에서 깨어나자 새까만 현실이 두 눈에 들어왔다. 이제야 조금 묘했던 그의 태도가, 그리고 이전 회차와는 미묘하게 다른 모습이 겹쳐지며 비로서 이해가 갔다.

 

 


"병신새끼."


"악마소환 쓰레기새끼..."


"이런다고 내가, 내가 고마워 할 줄 알아...?"


"웃기지 마! 희생병 걸려서 환장했냐고... 내가 언제, 이런걸 원했어...? 제멋대로 굴어놓고, 빚이라도 지웠다고 재수없게 굴 생각이면 헛소리 말라고 할테니까..."


"씨발... 다 잊혀지고 지켜만보는게, 그게 얼마나 거지같은 일인데, 갑자기 군사가 아니라 성인군자 노릇이라도 하고싶었던 것도 아니고... 그동안 잘도... 잘만... 여태껏 날 속인거야. 기만한거라고."

 


넋 놓고 헛소리를 지껄이는 교국의 성자이자 명예추기경, 그리고 희생과 부활의 신을 감히 진정시키려고 시도할 수 있는 이는 물론 성치 못해보이는 몸으로 돌연 뛰쳐가는 그를 붙잡지도, 말리지도 못한채 어쩔줄 몰라하며 그의 걸음에 맞추어 뒤를 쫒는 제법 우스꽝스러운 대열이 따라붙었다. 그들을 달고서, 이기영이 곧장 달려가는 곳은 정해져있었다.

 


"나쁜 새끼야...! 그런 일이 있었으면, 한마디 쯤은 했을 수도 있잖아. 억울하지도 않아? 답지 않게 왜 호구짓을 하고 지랄이냐고!"

 


기다리고 있었다는듯 저를 맞는 진청의 모습에 있는 힘껏 멱살을 틀어쥐었지만 체격 차로 인해 도리어 매달린 것 같은 꼴이 되어버렸다. 그탓에 더욱 서러워져 소리치며 따져왔지만 그의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 없었다. 오히려, 약간의 미소마저 머금은채 제게 처들어온 불청객을 맞아왔다.

 


"그 말, 그대로 돌려주고 싶군."


"뭐, 이...!"

 


그 둘과 별개로, 자신들의 지휘관의 멱살을 붙잡고 있는 두더지 성녀 공략원정대의 총사령관의 모습에 부관들은 곤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둘의 사이가 호의적인 관계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엄연히 양국의 상징적인 존재였기에 그들사이의 작은 사건도 국가적인 문제가 될 수 있었기에 더더욱 곤란하기 그지 없었다.

 


"명예추기경님께서 지금 과흥분 상태시라... 수면마법으로라도 진정을 시키겠습니다."


"내가 알아서 할테니 참견 말고 괜히 주변이 어수선해지지 않도록 정돈하도록."

 


누가 봐도 평소의 명예추기경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이성을 잃었음을 뒷받쳐주기에 흥분으로 흐트러진 숨을 씨근덕거리는 모습에 혹 이러다 귀한 몸이 자칫 탈이라도 날까, 그리고 그로 인해 경을 치게 될까 안절부절 못하며 조심스럽게 그를 떨어트리려 드는 동시에 상급자의 허가를 받아 마법을 사용하려 들었으나 손을 들어 제지한뒤 그들을 물려왔다.

 


"특히, 그 목줄 풀린 미친연놈들... 아니, 파란측에 소식이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해서 처리하도록."

 


다른 이들을 전부 물렸음에도 아직까지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채 뒤늦게 여기까지 다급히 온 후유증을 겪는듯한 모습에 품에 안은채 시선을 맞추고 건내는 말에 마법보다 더 마법처럼 흐트러진 숨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천천히, 숨 쉬어."


"흐... 하, 하악... 하. 아..."


"..이제야 조금, 대화를 할 만한 상태가 되었군."

 


안아든 상태로 천천히 몸을 더듬으며 외상을 찾는 동시에 청결 마법에 더해 마력으로 몸을 흝어 다른 이상을 살펴왔지만 생명에 지장이 될만한 상흔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 사실에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거기서 제대로 잠은 잤나, 식사는?"


"지금... 그런게 중요해요?"

 


기껏 처음 꺼낸 제대로 건낸 한마디는 일상적인 안부의 말에 가까워 지금 이 극적인 재회에 오히려 너무나도 터무니 없는 발언이었기에 그의 말에 이기영은 황당하다는듯 하, 가까스로 고른 숨을 내뱉어왔다.

 


"네가 염려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걸 위해 준비했던 만큼 아직 여유가 있으니까, 우선은 충분한 휴식을 취한뒤에 뒷일을 마저 생각하도록 하자."

 


몸의 정돈이 끝났으니 간단히 요기를 할만한 것들을 내주면서 가볍게 바짝 당겨진 신경줄을 느슨하게 해줄겸 안정제 대신 건내는 술잔에 정말 또렷히 이전회차의 일들을 기억하는 것 마냥 의심과 힐난의 눈길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또 와인에다가 약 탈거죠?"

 


그 말에 굳이 말로 해명하는 대신 제 입에 고스란히 가져다대 삼켜왔다. 잔의 절반을 넘기고, 남은 절반은 그대로 입에 머금고 이기영의 입술을 향하였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고스란히 넘겨주자 꿀꺽 목울대가 울렁임과 동시에 입술이 떨어져나갔다.

 


"이제 조금은 신뢰가 들까?"


"...흥, 독살을 하려 들면 자신이 먹을 해독제는 기본 아닙니까?"


"나를 믿지 않았다면 고스란히 삼키지도 않았겠지."


"재수없어..."

 


꼭 저를 전부 안다는 듯한 태도가 아니꼬왔지만 동시에 사실이라 달리 할 수 있는 말이 없었기에 불만스럽게 꿍얼거리자 여유 시간을 확인하며 자신의 침대로 이끌어왔다. 그 모습에 다른 의미가 있는게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 일부러 모난 말을 삐죽여왔다.

 


"아주 여유가 넘치나봐요. 여기가 던전이지, 무슨 모텔이라도 되는줄 알아."


"무얼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단순히 짧은 낮잠이다. 지금 그 상태로 출정하겠다는 것은 아니겠지? 만전을 기해야 하는 만큼 너 또한 최상의 상태가 되어야 할 필요가 있어."

 


고작 이런 도발에 얼굴을 붉히기에는 진청은 연륜이 충분했고, 더한 이기영의 도발에 익숙했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턱 바로 아래까지 이불을 끌어올려주는 것에 더해 회귀까지 해서는 고작 얻은게 저런걸 만드는 취미라도 생겼는지 익숙하게 머리 맡에 달아오는 드림캐쳐를 보고서 질리도록 봐온 익숙한 물체에 그의 미간은 찡그려졌지만 눈빛에 담긴 반가움은 감출 수 없었다.

 


"..또 드림캐쳐야. 내 생일선물을 매년 잘도 이런걸로 때우려고..."


"그럴리가."


"나, 잘건데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에요. 두고봐. 해마다 공화국 거덜낼 기세로 뜯어낼테니까."


"훗, 기대되는군."


"..가지마요. 눈 떴을때 없으면... 진짜, 용서. 안할테니까..."

 


매일 제 잠자리를 지켜주었던 낯익은 것과 함께하니 그의 품에서 긴장이 늦춰짐과 동시에 억누른 피로가 함께 밀려온듯 느릿하게 감겨오는 눈꺼풀에는 이미 무거운 잠이 쌓여있었다.

 


"잘 자렴. 내 사랑, 울지 말고. 아침이 밝아오면 반드시 미소로 깨워줄테니. 황금빛 꿈에 둘러쌓여 달콤한 꿈을 꾸자구나."

 


조곤조곤 속삭이듯이 낮은 목소리로 귓가에 자장가를 불러주자 그 익숙하고도 그리운 선율에 진정이 된듯 이윽고 옷자락을 꽉 움켜쥔 손이 느슨해지며 스르륵 수마에 빠져들었다. 그때와 같이 평온한 얼굴, 미동조차 없는 몸에 흠칫 놀라 작게 오르내리는 가슴팍을, 숨을 두 눈으로 확인하면서 토닥토닥 가볍게 그의 몸을 두드려주니 여전히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에 비로서 지난 날의 과오를 되잡았음을 느껴왔다.

 


"생일 축하한다. 이기영."

 


그때 전하지 못한 말이 먼길 돌아 드디어 닿았다. 지독한 악몽과도 같았던 나날의 끝을 고하자 덩달아 바짝 당겨진 신경줄이 느슨해지는 것을 느꼈다. 한고비는 넘겼다한들 아직 골치아픈 일들이 남아있지만 우선은 함께 있는 시간을 누리기로 했다. 그의 머리맡에 걸린 드림캐쳐가 악몽을 걸러낸듯 작게 흔들렸다.


기나긴 악몽은 끝났으니 이제 달콤한 단잠에서 깨어나 황금빛 여명과 함께 밝아올 아침을 맞을 시간이었다.

끝.png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