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 니쥬 ( @needyou913 )
“형님 많이 피곤해보이오.”
“잠을 좀 설쳐서 그런가. 괜찮아.”
걱정스러운 표정의 박덕구에게 새로운 일을 주며 서둘러 내보내고는 미간을 주물렀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거울 속의 안색이 창백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며칠 전부터 잠 못 이루는 밤이 계속되었다. 3월 4일이 다가올 수 록 모든 것을 살피고 또 살피느라 일 분 일초가 아까웠던 탓이다. 이기영에게 있어서 3월 4일은 13일의 금요일 보다 무서운 날이다. 그리고 오늘은 바로 그 3월 4일 하루 전 날 밤이다.
지구에서의 3월 4일에는 부모님이 이혼 하셨다. 그날부터 이기영과 이율하에게 믿을 사람이라곤 서로밖에 없었다. 절망스러웠던 고등학교 3학년의 3월 4일. 어려운 형편에 문제집 하나 사는 것도 힘들었지만, 아득바득 공부해서 원하던 대학에 합격했다. 그러나 전액장학금이 아니었기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으로 스스로와 주변의 환경이 원망스러웠다. 과외라도, 남들 다 듣는 인강이라도 들을 수 있었다면 달라졌을까.
린델에서 기억나는 3월 4일은 쓰러졌다가 눈을 뜬 날이고, 당연히 옆에 있어야할 박덕구가 없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주변인들의 축하를 받으며, 생일선물을 받고 행복한 하루를 보낼 텐데, 이기영은 자신의 생일이 너무나도 싫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달력에서 3월 4일을 지워버리고 싶은 마음이다.
매번 끔찍할 정도로 불행한 일이 벌어졌던 3월 4일이 다가올수록 이기영은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며 주변의 위험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잘 감추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눈치없는 박덕구가 알아차릴 정도로 피곤함이 티가 났나싶어 잠시, 정말 잠시 눈을 감기로 했다.
한 5분쯤 지났을까? 잠과 현실의 경계에서 오락가락 하던 찰나 뺨에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에 눈이 번쩍 뜨였다. 루시퍼와 벨리알. 이 빌어먹을 악마들이 내 집무실엔 무슨 일로 왔을까. 생글생글 웃는 낯짝들을 보니 심히 수상했다. 또 무슨 일을 벌인걸까. 의심의 눈초리를 숨기지 않고 머리를 굴리며 수백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했다.
“생일 선물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 수백 가지 경우를 모두 빗나가며, 전혀 예상치도 못한 말이 벨리알에게서 튀어나왔다. 루시퍼는 예상외의 상황에 약간 입을 벌린 이기영의 턱을 손수 닫아주고는 손을 잡아 밖으로 이끌었다. 길드 내의 불이 전부 꺼져있어 복도는 어둠으로 가득했다. 정말 잠깐 잠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어두워질 때까지 정신 못 차리고 잠에 빠져있었다니... 벨리알과 루시퍼의 에스코트를 받아 어두운 계단을 더듬거리며 내려왔다.
오늘 바닥청소라도 했는지 걸음마다 발밑에서 찰박거리는 소리가 났다. 갑작스레 이기영의 뒤에 위치한 벨리알이 그의 눈을 손으로 덮어 가렸다. 그제서야 그들이 선물을 준비했다는 게 제대로 인식이 되었다. 뭐야 진짜로?? 악마도 생일을 축하하나. 여전히 혼란스러웠지만 조금 설레기도 했다.
“우리가 준비한 선물이야.”
“그대 맘에 들었으면 좋겠군.”
과연 무엇을 준비했길래 이렇게 눈까지 가려가며 기대치를 높이는 걸까. 손바닥 너머로도 불이 환하게 게 밝혀지는 게 보였다. 두근거림을 애써 누르며 서둘러 열리지 않는 시야에 조금 답답해질 무렵, 천천히 벌어지는 벨리알의 기다란 손가락 틈 사이로 보이는 것들에 이기영은 너무 놀라 말을 잃었다. 시야를 방해하는 것이 모두 치워졌음에도 이기영은 도리어 두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루시퍼는 도통 눈을 뜨려하지 않는 이기영의 손을 잡아 이끌며 ‘그것’에게 다가갔다. 여전히 발치에선 찰박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기영은 그것이 무엇인지 봐버렸기 때문에 치밀어 오르는 토기를 참지 못하고 입을 틀어막으며 반사적으로 눈을 떴다. 그리곤 곧바로 후회했다. 바닥은 온통 피투성이에 그 검붉은 액체의 시작점을 찾아 시선을 옮기다 보면, 그 끝에는 마치 케이크 처럼 정성 들여쌓아둔 수많은 시체의 산이 있었다.
“이게... 뭡니까.”
피에 절어 알아볼 수 없는 얼굴들이 있었고, 또 반대로 너무 선명하게 보이는 얼굴도 있었다. 이름처럼 새하얀 것을 좋아하던 하얀이의 하얀 로브가 옆에 있는 차희라의 머리색 보다 붉게 물들어있었다. 시체 더미에 깔려 팔 하나만이 밖으로 비어져 나와있었지만, 이기영은 그 흉 많은 팔이 박덕구임을 쉽게 알아봤다. 시체의 꼭대기에는 김현성이 널브러져 있었고, 그의 가슴팍에는 케이크의 초 대신 그가 아끼는 듀렌달이 꽂혀있었다. 아니야, 그럴리 없어. 김현성이 이렇게 쉽게 죽었을리 없어. 하얀이도 마찬가지야. 그래, 그럴리가...!
“꽤 힘들었다구요?”
“이제 이 세계의 주인은 너다.”
미친 악마새끼들이 입을 죽 찢어 웃으며 마음에 드냐고 물어왔다. 미친. 미친. 미친...! 2회차를 만드는데는 루시퍼의 도움이 있었기에 어느정도 가능했다. 그렇다면 지금은? 루시퍼가 과연 다시 나를 도울거란 기대는 접는 것이 맞았다. 이기영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들을 꾹 눌러 삼키며 생각을 이어가기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그런 이기영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루시퍼와 벨리알이 손끝을 튕기자마자 시체 더미에 불이 붙었고, 순식간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인간들은 촛불을 불면서 소원을 빈다며?”
“자, 어서 소원을 빌어라.”
선명하게 빛나는 자안과 금안에 소름이 끼쳤다. 이기영은 굳어버린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발에 못이라도 박힌듯 그 자리에 서서 꼼짝 할 수도 없었다. 순식간에 번진 불이 김현성 마저 삼켜버렸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무력감을 느껴본 적이 있던가. 이기영은 자신 안의 무언가가 끊어진 것을 느꼈다. 어서 소원을 빌라며 재촉하는 악마의 속삭임에 고개를 저으며 소리쳤다. 아냐.. 아니야... 이건, 이건 꿈이야!!
“아, 안돼!!!!”
앉은 자리에서 의자가 뒤로 넘어갈 정도로 거칠게 일어섰다. 정말 꿈이었나? 이기영은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대충 닦아냈다. 몸이 피곤하니 이런 개꿈을 꾼 모양이다. 그러나 치미는 불안감을 무시할 수 없었다. 당장 그들이 무사한지 부터 확인해야 이 떨림이 멈출 것 같았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문을 열자 꿈에서와 같이 빛 하나 없는 어둑한 복도가 펼쳐졌다.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끼쳤다. 1층으로 내려가면 꿈에서 봤던 끔찍한 광경이 펼쳐질 것만 같았다. 난간에 의지해 겨우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내려가고 싶지 않았다. 혹시 진짜면, 진짜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혹시나 하는 생각에 마지막 한 칸을 남겨두고 이기영은 결국 계단에 주저앉고 말았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고 숨을 죽였다.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바로 그때, 저벅저벅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루시퍼나 벨리알이 아니기를 그 짧은 순간에 몇 번을 기도했는지 모른다. 어깨에 손이 짚어지고, 고개를 들어 눈을 떴을때 이기영의 눈 앞에 또 다시 불이 일렁였다.
“악!!!”
“어이쿠! 형님, 괜찮소?”
“이, 이 돼지새끼가!!”
눈 앞에 케이크를 들이댄 박덕구 때문에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다. 비틀거리는 이기영의 옆에는 어느새 비명소리를 듣고 놀라 달려온 김현성이 서 있었다.
“기영씨 괜찮으십니까.”
“이렇게까지 놀랄 줄은 몰랐는데...”
이기영은 김현성의 팔에 기대어 서서 박덕구를 노려봤다. 정확히는 박덕구가 들고있는 새하얀 생크림 케이크를 말이다. 그 위에서 일렁이는 촛불을 당장에 꺼버리고 싶었다.
“소, 소라야 오, 오빠가 전혀 모, 몰랐나봐!”
“네 하얀님! 깜짝 파티가 성공했어요!!”
하얀이와 소라는 박덕구의 뒤에서 쏙 하고 나타났다. 심장마비가 올 뻔 했는데 겨우 깜짝 파티란다. 이기영은 다시 한 번 비틀거렸다. 그에 김현성이 이기영의 상태를 더욱 주의 깊게 살피며, 이기영을 부축해 로비에 있는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는 사회자를 자청하는 안기모의 말에 따라 선물 증정식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로 불린 하얀이는 해맑게 웃으며 온갖 호신 마법이 걸려있는 아티팩트를 선물로 주었다. 그 다음으로 한소라는 하얀이의 시선에 덜덜 떨면서도 나와 하얀이 세트로 만들어진 인형을 선물로 건냈다. 커, 커플이야.. 라고 중얼거리는 하얀이의 말은 못들은 척 했다. 수많은 사람에게 축하의 말과 선물을 받았다. 이걸 언제 정리하나 싶을 정도로 많은 물건이 이기영의 옆에 차곡차곡 쌓여만 갔다.
“드디어 내 차례구만!”
박덕구는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커다란 자루를 앞에 내려놓았다. 꽤나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묶은 끈을 풀어냈다.
“형님이 좋아하는 거요.”
펼쳐진 허름한 자루 안에는 노랗게 빛나는 망고가 가득했다. 향 까지 달큰한 과일을 보니 문득 1회차의 기억이 스쳐지나간다. 입 짧은 형님이 유일하게 좋아하는 거라며 특별한 날이면 꼭 한 개씩 커다란 손에 쥐고 오던 박덕구. 1회차에서 맞이한 몇 번의 3월 4일은 모두 박덕구의 선물로 웃었던 것도 같다.
그땐 정말 가난하고 가난해서 겨우 한 개로 만족해야 했는데... 박덕구가 자루채로 들고온 망고를 보니 감회가 새롭다. 우리는 이렇게 달라졌는데, 나는 지난 과거가 뭐 그리 두려워서 거기에 메어 있었을까. 평소 같았으면 그들의 수상한 행동에 바로 이상함을 눈치 챘겠지만, 불안에 떨던 나는 정작 그들을 살필 생각도 하지 못했다. 망고가 너무 많아서. 향이 너무 달아서, 그래서 코 끝이 시큰하게 아려왔다.
“고맙다.”
“다 먹으면 내가 또 사 올테니 팍팍 좀 먹으쇼!”
헤실헤실 웃는 박덕구와 자루를 옆으로 밀어내고 김현성이 그 자리에 섰다. 박덕구의 선물에 이기영이 상당히 만족한 것을 느꼈는지 조금 우물쭈물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현성아 형은 니가 쓰레기를 줘도 오케이란다. 우리 회귀자가 정말 쓰레기를 주는건 아니겠지..? 김현성이 수줍게 내민 두 손에는 눈 돌아갈 만큼 비싼 와인이 한 병 들려있었다.
“현성씨”
“네,네! 기영씨!”
“...또 빚진건 아니죠?”
“아닙니다! 기영씨 생일을 위해서 차곡차곡 모았던 돈으로 샀어요! 정말입니다.”
굉장히 억울해 보이는 김현성에게서 서둘러 와인을 받아들고 미안하고 고맙다고 말했다. 와인과 함께 먹을 거울연어 요리도 준비했다며 웃는 현성이를 보며 마주 웃었다. 그래. 혹여 또 내게 불행한 일이 생긴다 할지라도 예전과는 다르다. 이번에는 나와 함께 싸워줄 동료가 있으니 나는 더 이상 3월 4일이 두렵지 않다.
생일 축하한다. 이기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