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 심해의 숲 ( @dsf2710 )
생일 축하는 갑작스럽게 시작되었다.
막 잠에서 깨어 비몽사몽할 때,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창없방의 문이 열린 것이다.
“흐억?!”
입에서 절로 이상한 소리가 튀어나온다.
‘뭐지?’
무슨 일이지? 파드득 몸을 일으키자 혼란이 가시기도 전에 눈앞에 케이크가 나타났다. 진짜 뭐지?
눈 덮인 설원처럼 새하얀 생크림 위를 광택이 흐르는 산딸기가 장식한, 아주 먹음직스러운 케이크다. 그리고 그걸 들고 있는 정하얀은 해맑게 웃고 있었다. 내가 이 선물을 기뻐할 거라고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고 있는 얼굴이다.
“기영 씨, 생일 축하합니다!”
“오, 오, 오빠! 생일 추, 축하해요!”
“어, 어어…. 고마워.”
어리둥절하며 케이크를 받아 들자 정하얀과 김현성이 자연스럽게 양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정하얀은 평소에 입던 마법사스러운 옷이 아닌 레이스가 잔뜩 달린 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김현성 역시 특별히 단장했는지 얼굴에서 아주 빛이 날 정도였다. 한껏 꾸민 듯한 그들의 모습을 보니 괜스레 부스스한 자신의 몰골이 신경 쓰인다. 머쓱하게 까치집이 된 머리를 누르고 있으려니 행복한 미소를 만면에 띄운 정하얀이 입가로 티포크를 가져다 대었다.
“오, 오빠! 아, 하세요!”
티포크의 끝에는 생크림이 묻은 산딸기가 꽂혀 있었다. 케이크를 장식하던 것이다. 멍하니 있느라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산딸기가 비집고 들어온다. 얌전히 산딸기를 받아먹는데 김현성이 품 안에서 보온병을 주섬주섬 꺼내는 것이 보인다. 뚜껑을 열자마자 풍기는 향에 그 안에 든 것이 커피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여기요.”
“아, 감사합니다.”
김현성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긴 머그컵을 손에 쥐여 주었다. 따뜻한 온기와 감미로운 커피 향 덕분에 조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오늘이 내 생일이었지.’
이 녀석들, 가장 먼저 축하해주고 싶었구나.
호록,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내 취향에 정확히 부합하는 맛이다. 그리고 어제, 가 아니라, 정확히는 야근하느라 깨어있던 지난 밤 12시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누나, 이게 뭐야?”
“뭐긴, 생일 선물이지. 생일 축하해요.”
“아, 벌써 그렇게 됐네. 고마워, 누나.”
다행히 그 선물은 집무실 책상 서랍 안에 잘 넣어뒀다.
‘들키지 않게 조심해야지.’
가장 먼저 축하한 게 아닌 거 알면 실망하자너.
케이크는 상당히 맛있었다. 이 정도면 아이템 판정을 받아도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디자인은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정석적인 생크림 케이크지만, 오히려 정석적이기에 이 케이크를 만든 사람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이 드러났다.
가장 먼저 우유 특유의 고소한 향이 살아있는 생크림의 맛이 입 안에 퍼진다. 케이크 시트 역시 촉촉하고 포실포실한 식감과 담백한 맛이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았고, 시트 사이사이를 채운 상큼한 라즈베리 잼은 생크림의 단맛과 어우러지며 식욕을 돋운다. 갓 수확한 듯 신선한 산딸기 역시 맛있었다. 게다가 자세히 보니 케이크의 표면에 보일 듯 말 듯 금빛 가루가 뿌려져 있어 자칫 심심하게 보일 수 있는 외견을 고급스럽게 꾸몄다는 점에서 제과사의 심미안 역시 뛰어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마, 맛있어요?”
“응. 맛있네.”
“히힛. 이거 제, 제가 만들었어요! 히히.”
‘한소라가 만들었구나.’
물론 정하얀도 이제는 제법 요리 실력이 늘었으니 케이크를 만드는 데 꽤 많이 공헌했겠지만 이런 완벽한 맛을 구현한 일등 공신은 한소라일 것이다. 그래도 칭찬의 의미로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히히히…….”
정하얀이 톱밥 사이를 파고드는 햄스터처럼 품 안을 파고들어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하마터면 먹은 걸 도로 게워낼 뻔했다.
김현성과 정하얀의 습격 같은 축하가 지나가고 다음 타자가 된 건 박기리였다.
“형님! 생일 축하하오!”
“축하합니다.”
“축하.”
이제 막 창없방에서 풀려나 집무실로 가는 도중에 붙잡혔다. 커다란 케이크를 내미는 박덕구의 좌우에 선 안기모와 김예리가 짝짝짝 박수를 쳤다. 또다시 눈앞에 들이 밀어진 케이크에 조금 질린 기분이 되었지만 차마 내색할 순 없었다.
“선물로 케이크를 사왔소.”
윗면에만 생크림으로 아이싱한 레이어 케이크는 색색의 시트 사이를 생크림과 라즈베리 잼이 채우며 조화롭게 층을 이루는 것이 고스란히 보인다. 새하얀 생크림의 정중앙에는 역시나 산딸기가 곱게 놓여 있었고, 복잡한 무늬를 그리는 초콜릿 시럽과 금빛 가루가 그 주변을 장식하고 있다. 그리고 화려한 레이어를 만들기 위함인지 케이크의 높이가 꽤 높았다.
“고마워.”
‘배부른데.’
이미 김현성과 정하얀에게 붙들려 케이크 하나를 해치운 뒤다. 이 커다란 녀석이 목구멍으로 넘어갈 리 없다. 그러나 돼지 녀석의 환한 얼굴을 보니 차마 거절할 순 없었다.
‘이거 먹다가 토하는 건 아니겠지?’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박덕구는 사람 좋게 웃으면서 큼지막한 케이크 조각을 티포크로 쿡 찔러 내밀었다. 커다란 박덕구의 손에 들린 작은 티포크가 마치 이쑤시개처럼 보였다.
“요 앞에 엄청 유명한 빵집 있잖소, 거기서 형님 생일을 축하한다고 특별 메뉴를 파는 거 아니오!”
‘그거 상술 아니야?’
의심스러웠지만 즐거워 보이는 박덕구의 얼굴을 보니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든다.
‘설마 배 터져 죽기야 하겠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심정으로 입을 벌리니 커다란 케이크 조각이 안으로 밀고 들어온다. 부드럽고 폭신한 케이크 시트와 달콤한 생크림, 상큼한 라즈베리 잼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입 안에서 녹아내렸다. 케이크 하나를 해치우기 전에 먹었다면 더욱 좋았을 텐데.
“맛있네. 너도 먹어라.”
정말 맛있지만 배가 불러 도저히 다 못 먹을 것 같다. 먹을 걸 좋아하는 녀석이라면 거절하지 않을 거라는 계산 하에 박덕구에게도 권했지만 의외로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럴 순 없소. 안 그래도 전보다 더 말라서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은데, 어떻게 형님 것을 빼앗아 먹을 수 있겠소.”
안기모와 김예리에게도 권하려고 했는데 이 영악한 돼지 녀석이 케이크를 뺏어 먹는 인간을 아주 대역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몰아간다. 이렇게 되면 이걸 나 혼자 다 먹어야 한다. 제발 좀 도와달라며 간절한 눈으로 안기모를 바라봤지만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외면당했다. 김예리 역시 도움 요청을 무시한 건 마찬가지. 결국 솥뚜껑만한 박덕구의 주먹을 두 개는 합친 것 같은 홀케이크를 혼자 해치워야 했다.
“맛있게 먹는 모습이 보기 좋소!”
“하하…….”
‘그래. 너라도 좋으니 다행이다.’
배불러서 죽을 것 같다. 그나마 절반 이상 먹어치운 시점에 보다 못한 안기모와 김예리가 몇 입 먹어줘서 버틸 수 있었다. 사람을 앞에 세워두고 혼자만 먹는 것이 민망하다는 호소가 먹혀들었는지 박덕구도 그 정도는 허용해 주었다.
더부룩한 속을 쓸며 겨우 집무실에 도착했다. 혹시나 케이크를 먹이려 들까 싶어 생일을 축하하려는 사람들을 피하다 보니 평소보다 출근 시간이 꽤 걸렸다. 돌발 상황으로 예정보다 늦었으니 오늘은 쉴 여유가 없으리라.
‘집무실 안에 소화제가 있었던가…….’
서랍을 뒤적여 봤지만 피로회복제만 잔뜩 나온다. 그나마 다행인 건 소화제를 만들 촉매도 있었다는 것. 이런 몸 상태론 일에 집중할 수 없으니 연금술 키트로 소화제부터 만들었다.
[소화제 – 희귀 등급]
역시 빛의 연금술사 짬밥이 어디 가지는 않는지 순식간에 만들어진 소화제를 마시자 불편하던 속이 한결 나아졌다. 빈 병을 책상 구석에 올려두는데 문득 위화감이 느껴진다.
‘뭐야. 서류 다 어디 갔어.’
책상 위가 깨끗하다. 종이는 물론이고 만년필도, 잉크도 보이지 않는다.
‘도둑? 아니면 산업 스파이인가? 하지만 파란의 보안을 뚫는 게 가능할 리 없는데.’
우선 김미영 팀장에게 연락하기 위해 손거울을 꺼내드는 찰나 단정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부길드마스터. 들어가겠습니다.”
“아, 혜진아.”
익숙한 목소리의 정체는 소중한 친구 조혜진이었다. 우선 혜진이가 가져온 서류를 처리하고 대신 사태 파악을 해달라고 하려 했는데, 서류가 들려있어야 할 조혜진의 손에는 서류 대신 작은 조각 케이크가 있었다.
“혜진아……?”
“오늘 일정은 전부 비워뒀습니다.”
“예?”
청천벽력 같은 소리다. 빛기영 쯤 되는 사람의 생일이라면 대륙 전체의 기념일이나 마찬가지, 당연히 빛기영 본인도 여기저기 얼굴 비추느라 바빠야 하는데.
“아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파란 내부 일정이라면 몰라도 외부 일정을 그렇게 멋대로 취소하면…….”
“이미 양해를 구하고 결정된 사항입니다. 부길드마스터는 오늘 하루 얌전히 놀기나 하시죠.”
뭐라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조혜진은 단호했다.
그렇게 작은 조각 케이크를 마주하게 되었다. 겉면을 가나슈로 아이싱한 모카 케이크는 설탕공예로 만든 푸른 장미로 장식되어 있었고, 가장자리에 금빛 가루도 뿌려진 아주 호화로운 케이크였다. 특히나 반투명한 꽃잎이 수십 장은 겹쳐진 것 같은 설탕 장미는 정말 먹는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이 정도면 예술 작품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이런 건 대체 어디서 파는 거야?’
의문은 금방 풀렸다.
“파란의 요리사가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습니다. 시간 나면 식당에서 밥 좀 드시죠. 요즘들어 부길드마스터께서 밥 먹으러 안 오신다고 아주 침울해 보이던데요.”
그러고 보니 최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밥 먹을 시간도 없었다.
‘혹시…….’
어쩐지 요 일주일간 일거리가 몰아치던 게 오늘 내 시간을 비워두기 위한 계략이 아니었나 하는 킹리적 갓심이 든다.
“하지만.”
바빠서 그랬다고 변명하려 했지만 조혜진의 단호한 시선에 결국 티포크를 들 수밖에 없었다.
“잘 먹을게…….”
“아, 이건 제 선물입니다.”
그리고 조혜진은 케이크 옆에 작은 상자를 내려놓았다. 혜진이가 좋아하는 파란 리본이 예쁘게 묶인, 손바닥보다 조금 크고 낮은 상자다.
“생일 축하해, 기영아.”
“고마워.”
가슴이 따뜻해지는 광경이다. 슬쩍 티포크를 내려두고 포장을 풀자 고급스러운 상자에 담긴 만년필이 드러났다. 전에 쓰던 것과 같은 브랜드지만 처음 보는 디자인인 게 아무래도 특별히 주문 제작을 넣은 물건인 것 같다.
‘지혜 누나에게 자랑해야지.’
갑작스레 생긴 휴일이지만 집무실 밖으로 나갈 생각은 없었다. 그냥 조혜진과 수다를 떨며 체스를 뒀다.
‘괜히 밖에 나가면 케이크를 든 누군가와 마주칠 것 같자너.’
이대로 시간이나 때우다 식사 시간이 되면 식당으로 내려가 요리사에게 케이크 잘 먹었다는 말이나 해줄 생각이었다.
삐빅, 삐빅, 삐빅.
갑자기 울린 알람 소리만 아니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시간이 다 되었네요. 저는 이제 가보겠습니다.”
“그럼 이번 판은 제가 이긴 거로 해도 되죠?”
“그러시죠.”
조혜진은 손거울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녀와 교대하듯 선희영이 들어왔다.
“아, 희영 씨. 무슨 일로…….”
오랜만에 봉사나 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려는 찰나, 선희영이 끌고 온 트롤리 카트가 보였다.
“오랜만입니다, 이기영 님.”
“희영 씨? 이건…….”
“오늘이 생일이시라기에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눈앞에 놓인 당근 케이크. 내 안색이 창백해지는 줄도 모르고 선희영은 트롤리에서 아기자기한 티세트를 차례로 꺼냈다. 3단 트레이까지 꺼내 몇 가지 디저트도 곁들이니 순식간에 완벽한 티타임 세팅이 끝났다. 눈 앞에 펼쳐진 다과들은 매우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하지만…….
‘배불러.’
지금의 나는 홀케이크 두 개와 커피 한 잔, 희귀 등급 소화제, 조각 케이크 하나가 배를 가득 채운 상태. 이 이상 도저히 뭘 더 집어넣을 수 없다. 오죽하면 깨작거리며 겨우 입 안에 케이크를 욱여넣는 나를 불쌍하게 바라보며 조혜진이 조각 케이크의 절반을 대신 먹어줬을까. 그러나 케이크 한 조각을 잘라 건네주는 선희영의 상냥한 미소를 차마 무시할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눈물을 머금고 작은 케이크 조각을 화려한 티포크로 콕 찍어 입에 넣었다. 계피향과 달달한 크림치즈의 맛이 입 안 가득 퍼진다. 맛은 있지만 이미 한계까지 꽉 찬 뱃속에 이 이상 뭔가를 더 밀어 넣는 건 무리였다.
“이기영 님.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창백하신데…….”
“괜찮습니다. 하하, 맛있네요.”
태연하게 웃으며 보란 듯이 한 입 더 먹었다. 배부르다고 투정이라도 부려볼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그대로 창없방에 감금당할 것 같아 그만뒀다. 대신 슬그머니 티포크를 내려놓으며 대화를 시도했다.
“요즘 봉사활동은 잘 되어 갑니까?”
“예. 쓸모없는 인간들이 줄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베니고어 여신님의 은총 덕분이죠.”
“이기영 님 덕분이기도 합니다.”
“하하. 부끄럽습니다.”
서로의 얼굴에 금칠을 해대며 대화를 나누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특히나 최근엔 선희영과 함께 할 일이 없었으니 더욱 즐겁다. 오랜만에 나누는 대화에 집중하느라 케이크를 먹는 것도 깜박 잊을 정도로 즐거웠다.
삐빅, 삐빅, 삐빅.
선희영의 손거울이 삐빅거리며 알람 소리를 토해낸 순간, 슬슬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아…. 시간이 다 되었네요.”
“예?”
“케이크는… 얼마 드시지도 못했네요. 혹시 몸이 안 좋으신 건…….”
“아뇨, 아닙니다. 희영 씨와 대화하는 게 너무 즐거워서 그만.”
“그럼 이건 여기 놓고 가겠습니다.”
선희영은 보존 마법이 걸린 새하얀 박스에 한 조각이 빈 당근 케이크를 넣어 책상 위에 올려둔 뒤 다기를 트롤리로 옮기기 시작했다.
“도와드릴까요?”
“괜찮습니다. 그보다 조만간 봉사활동을…….”
“한번 시간을 내 보겠습니다만 어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아쉽네요.”
책상 위가 깔끔하게 정리되자마자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렇게 선희영이 떠나고, 교대하듯 엘레나가 들어왔다. 이쯤에서 오늘 일정이 전부 취소된 이유를 눈치챌 수 있었다. 이 녀석들은 대륙의 아이돌인 이기영을 독점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도 이기영의 생일에.
그것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소중히 여겨지고 있다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우리 애들이 원한다잖아.’
“오랜만이에요, 이기영 님.”
“예에…. 오랜만입니다. 엘레나 님.”
다만 문제는 이 녀석들이 내게 뭔가를 먹이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는 것이다. 지금 엘레나가 들고 있는 작은 상자 안에도 분명 먹을 것이 들어있을 거다.
“생일 축하합니다!”
상투적인 인사와 함께 열린 상자 안에는 역시나 컵케이크가 들어있었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컵케이크는 빨간 조각이 점점이 박힌 생크림이 듬뿍 올라가 있었고, 그 위에 작게 부서진 견과류와 금빛 가루가 잔뜩 뿌려져 있었다.
“감사합니다. 맛있어 보이네요.”
“헤헤. 직접 만들었어요! 무, 물론 다른 분의 도움도 좀 있었지만…….”
“잘 먹을게요.”
생긋 미소지으며 작은 상자의 뚜껑을 닫고 선희영이 놓고 간 케이크 상자 옆에 놓으려니 엘레나의 기다란 귀가 축 늘어지는 것이 보인다. 어쩔 수 없이 슬그머니 상자를 다시 끌어와 컵케이크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어떤가요?”
“맛있네요.”
“그래요? 다행이에요.”
빈말이 아니라 정말 맛있다. 담백하게 구워진 컵케이크와 그 안에 들어있는 달콤한 라즈베리 퓨레가 입맛을 확 돋운다. 생크림 사이에 박혀있는 상큼한 산딸기 조각이 컵케이크가 너무 달지 않게 균형을 잡아주고, 견과류의 고소함은 더욱 풍부한 맛을 자아낸다. 담백함과 달콤함과 상큼함과 고소함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 한소라와 정하얀이 만든 케이크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혹시 이것도 한소라의 손을 탄 건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금가루는 아무 맛도 안 나네.’
지금 배가 부르지 않았다면 더욱 만족스러웠을 것이다. 덕분에 위장은 아슬아슬하게 한계에 걸친 상태.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컵케이크가 작다는 것일까.
‘그럼 파란만 상대하면 되겠네.’
파란의 핵심 인원 대부분을 만났으니 이 고생도 곧 끝나겠지.
컵케이크를 깨작깨작 먹으며 수다를 떨기 시작한 지 대략 10분이 지났다. 엘프 왕국의 현황과 파란의 신입들에 대해 떠들던 주제는 이제 주제넘게 혜진이를 노리는 엘리오스로 넘어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혜진 씨에겐 너무 과분하다니까요!”
“하핫….”
“차였으면 그걸로 끝이지 구질구질하게!”
‘걔는 아직도 포기 못 했대?’
“본인 말로는 우정이라고는 하지만 그건 누가 봐도 미련이라구요!”
공공의 적을 욕하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고, 즐거운 일을 할 때면 시간이 빨리 간다. 예의 그 삐빅거리는 알람이 울리고 엘레나는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손님은 마를린 의원이었다. 역시나 엘레나와 교대하며 집무실로 들어온 그녀는 어째선지 혼자 오지 않았다. 산더미 같은 짐을 든 장정 두어 명을 대동하고 온 것이다. 장정들은 몇 번인가 안과 밖을 왕복하며 집무실 구석에 짐을 쌓아놓더니 마를린 의원에게 꾸벅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저……. 마를린 의원님?”
“오랜만입니다. 이기영 명예추기경님.”
“이, 이건 대체…….”
“별거 아닙니다. 명예추기경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사람들이 보낸 선물이에요. 아, 이건 제가 드리는 선물입니다.”
마를린 의원이 내민 것 역시 케이크였다. 평범한 생크림 케이크에 여타 다른 것들처럼 산딸기로 장식된 것이지만 남들과 다른 점이라면 그 안에 수상한 약물이 들어갔다는 점일까.
[어미 잃은 새끼 오리의 눈물 – 전설 등급]
[섭취한 사람은 처음 본 사람을 무조건 따르게 된다.]
“…….”
‘조만간 블랙마켓 물갈이 좀 해야겠는데.’
케이크를 옆으로 밀어두자 마를린 위원이 초조해하며 물었다.
“안 드시나요?”
“네. 지금 좀 배가 불러서…….”
그렇게 말하며 빵 부스러기가 남은 작은 상자를 치우는 척하며 슬쩍 보여주었다. 자신의 계획이 틀어진 걸 눈치챈 마를린 의원은 작게 욕설을 중얼거리더니 케이크를 다시 휙 뺏어갔다.
“새, 생각해 보니까! 제가 이걸 만들 때 뭔가 시, 실수를! 한 것 같아요!”
그리고는 집무실 밖으로 후다닥 뛰어나갔다. 어찌나 급하게 도망쳤는지 문도 그대로 열려 있었다.
“마침 잘됐네.”
이 틈에 소화제나 하나 더 만들어 먹어야겠다.
노련한 손놀림으로 만든 소화제를 들이켜자마자 다음 손님이 들어왔다.
“자기, 오랜만이야?”
“누나.”
아마도 케이크가 들어있을 상자를 건네던 차희라는 내 손에 들린 빈 병을 보고는 얼굴을 무섭게 굳혔다.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아니야. 그냥 좀 과식을 했더니…….”
“그래?”
차희라는 책상 위에 쌓인 케이크 상자들을 보고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먹이를 눈앞에 둔 맹수처럼 입맛을 다시며 웃었다.
“속이 더부룩할 때는 운동이 최고지.”
“…….”
“안 그래, 자기?”
차희라가 다가온다. 뱀을 눈앞에 둔 쥐가 된 것처럼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한 발 두 발 뒷걸음질 쳤지만 차희라는 멀어진 거리만큼 간격을 좁혔다. 결국 등과 벽이 닿았다. 이 이상 도망칠 곳은 없었다.
“히익!”
머리 바로 옆에서 흉기나 다름없는 손이 나타나 벽을 턱 짚고, 몸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누, 누나.”
“시간 없으니까 빨리 하고 끝내자.”
“아, 안….”
“돼!”
안타깝게도 운동은 포만감을 해결해주지 못했다. 그래도 뭔가를 더 먹지 않은 것만으로도 차희라와의 만남은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
“자기, 다음번엔 좀 더 오래…. 알지?”
“으응….”
그 짧은 새에 정기를 쪽쪽 빨아먹은 차희라의 얼굴은 아주 반들거렸다. 그에 비하면 나는 10년은 늙은 모습이지 않을까. 착잡한 심정으로 오늘은 먹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피로회복제를 마셨다.
“으으, 배불러…….”
조만간 포션의 포만감을 줄이는 연구를 해야겠다. 지친 몸을 푹신한 의자에 누인 채 하릴없이 천장만 바라보는데 문득 마릴린 의원과 차희라는 파란의 소속이 아니라는 것이 생각났다.
‘파란이 휴일을 독점한 게 아니었나?’
파란만 상대하면 이 케이크 지옥이 끝날 거라는 예측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이건 꽤 심각한 문제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더 만나야 이 케이크 더미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래도 오늘 안에는 끝나겠지.’
자포자기하며 몸을 축 늘어뜨렸다. 똑똑. 문밖에서 단정한 노크 소리가 들린다.
“들어오세요.”
‘오지 마. 슈바.’
다음 손님의 정체는 상당히 의외였다.
“군사님?”
“그, 꼴이 그게 뭐냐.”
“아니 내 꼴이 뭐 어떻다고…….”
슬쩍 내려다 본 모습은 가관. 잔뜩 풀어 헤쳐진 앞섶도 문제지만 드러난 피부에 낮부끄러운 흔적이 남아있었다. 이 정도면 그 진청도 말을 더듬을만 했다. 생각지도 못한 몰골에 얼굴이 붉어지는 건 당연지사. 애써 태연한 척하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크흠! 그래서 군사님이 여긴 어쩐 일로…….”
“네 녀석 생일 때문이다.”
진청은 케이크 상자가 가득한 책상의 빈자리에 고급스럽게 포장된 선물 상자를 내려놓았다.
“공화국 측에서 보내는 물건이다. 이쪽은 총통의 친서.”
선물 상자 위에 공화국 인장이 찍힌 편지 봉투를 올려 둔 진청은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내밀었다.
“그리고 이건 내가 주는 선물이다.”
“감사합니다.”
진청의 손에 들린 상자는 누가 봐도 케이크가 들어있을 사이즈가 아니었다. 뭔지는 몰라도 케이크가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꺼운 선물이다.
큰 기대 없이 상자를 열자 보인 건 전혀 예상치 못한 물건이었다.
[소화제 - 영웅 등급]
‘청이 형아, 사랑해!’
천재 군사다운 시기적절한 선물이다. 심지어 세 개나 들어있다.
“영웅 등급 소화제는 구하기도 힘들 텐데. 혹시 주문 제작한 거예요?”
“…….”
청이 형아가 불쾌한 듯 얼굴을 찌푸렸지만, 지금은 기분이 좋으니 그냥 넘어가 주기로 했다. 까득. 맑고 영롱한 소리와 함께 포션 뚜껑이 열린다.
“캬! 확실히 영웅 등급은 뭐가 좀 다르긴 하네요.”
더부룩하던 속이 순식간에 편안해진다. 있는 재료로 대충 만든 희귀 등급 소화제와는 확실히 효능이 다르다.
“그럼 나는 이만…….”
“잠깐만요. 오신 김에 인증샷이나 찍고 가요. 홍보용으로.”
원래는 이렇게까지 해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모처럼 좋은 선물을 받았으니 서비스해주는 것도 좋겠지. 어차피 공화국 측에 답장을 보낼 예정이지만 이렇게 바로 인증사진을 찍어 공식계정에 올리면 더욱 우호적인 관계가 될 것이다.
“그, 그 상태로?”
“왜요?”
“아니, 하…….”
혹시나 놓친 게 있을까 싶어 다시 옷매무새를 점검했지만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은 없었다.
‘옷도 제대로 입었고 민망한 자국도 다 가렸는데 뭐가 문제라는 거야.’
어정쩡한 자세로 주춤거리는 진청의 옆에 달라붙어 손거울을 들었다. 체념한 듯한 한숨 소리가 거슬렸지만 소화제를 봐서 너그럽게 봐줬다.
“사진 잘 나왔네요.”
진청은 죄라도 지은 것처럼 얼굴이 살짝 일그러져 있었지만 나는 제법 괜찮게 나왔다.
“이기영, 잠깐. 아무래도 사진을 다시 찍는 게…….”
“이미 올렸거든요.”
“하아…….”
진청은 커다란 손으로 눈을 가린 채 깊은 한숨을 쉬었다. 장난을 칠 때면 종종 보던 모습이라 그냥 무시했다.
“나, 나는 이만 가보겠다.”
“그러세요.”
어째 서둘러서 나가는 모습이 꼭 도망치는 것 같았다.
갑자기 김현성에게서 전화가 걸려와 그 자식과 무슨 일이 있었냐고 추궁당하는 작은 소동이 일어난 뒤, 다음 손님이 도착했다.
“아버지를 뵙습니다.”
오랜만에 아이들의 얼굴을 보는 건 기뻐할 만한 일이지만 지금은 도저히 순수한 마음으로 반길 수 없을 것 같다. 아이들의 손에 저마다 먹을거리가 들려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부피가 아주 큰.
눈치가 빠른 아이들은 내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알아채고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애들이 눈치를 보게 둘 수는 없어 애써 미소지었다. 그제야 자신감을 얻었는지 아이들은 각자 가지고 온 선물을 내밀었다.
“선물입니다.”
“그래…….”
가장 먼저 선물을 내민 건 쓰로. 알록달록한 마카롱과 산딸기로 장식된 3단 케이크는 가나슈로 아이싱한 위에 금빛 가루를 잔뜩 뿌린 모습이 밤하늘의 은하수가 연상되었다. 거기에 바닥엔 폭신한 무지개 솜사탕을 잔뜩 깔아둔 탓에 꼭 구름 위에 세운 성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걸 다 먹을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깜깜해진다.
두 번째로 선물을 준 건 케루. 전체적으로 빨갛고 반짝반짝 빛나는 라즈베리 무스 케이크다. 동그랗고 빨간 반원 위에는 작고 앙증맞은 산딸기가 가운데 콕 박힌 초코 장식이 올라가 있었다.
‘산딸기도 이젠 좀 질리는데.’
게다가 이쪽에도 금빛 가루가 뿌려져 있다. 모양은 각기 다르지만 재료가 비슷해서인지 더 쉽게 질리는 것 같다.
세 번째는 도미였다. 어째선지 도미는 상자를 두 개 내밀었다.
“하나는 소화제입니다.”
“!!!”
도미의 말에 다른 아이들이 입을 쩍 벌리고 놀란 눈으로 도미를 바라봤다. 도미는 그 시선을 즐기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자신이 가장 적합한 선물을 했다는 걸 아는 얼굴이다.
“장하구나.”
고작 소화제를 선물한 걸로 장하다는 칭찬을 해주는 것도 웃기지만 이건 진심이었다. 도미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준 뒤 상자를 열자 커피콩 모양 초콜릿으로 장식된 모카 케이크가 보인다. 연한 베이지색 모카 크림 위에는 역시나 금빛 가루가 솔솔 뿌려져 있었다.
‘요즘 케이크에 금가루 뿌리는 게 유행인가?’
“저, 저기…. 아, 아버지….”
“괜찮아, 세라.”
“여기…. 서, 선물…입니다….”
마지막 차례는 세라. 마음 같아선 끝까지 무시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슬쩍 미소를 지어주니 용기를 얻은 세라가 손에 들린 케이크를 내밀었다.
‘이건…….’
새하얀 생크림 케이크와 신선한 산딸기, 그리고 금빛 가루. 많이 본 디자인의 케이크다. 훌륭한 완성도로 미루어 보니 이것 역시 한소라의 손에서 만들어졌음이 분명하다.
“정말 고맙구나, 나의 아이들아.”
흔한 감사의 말에도 아이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얼굴을 발갛게 붉히며 좋아했다. 반짝이는 네 쌍의 눈동자가 부담스럽다.
“이건 모처럼이니 다 같이 나눠 먹는 게 좋겠구나.”
이 어마어마한 양의 케이크를 혼자 다 먹을 자신이 없어 나눠 먹는 것을 제안했지만 아이들은 눈치만 볼 뿐 선뜻 케이크에 손을 대지 않았다.
‘이 녀석들이 내 말을 거부할 리가 없는데…….’
당장 세라만 봐도 케이크에 눈을 고정한 채 침을 질질 흘리고 있다. 도미와 케루도 안 그런 척하며 케이크를 힐끔거렸다. 먹고 싶다는 속내가 저렇게 빤히 드러나는데 왜 안 먹을까. 직접 먹여줘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할 즈음 도미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실토했다.
“저, 아버지. 실은 오다가 박덕구 님을 만났는데…….”
닭똥 같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박덕구가 “형님이 밥을 너무 적게 드시는 게 걱정이오!”라고 말하는 걸 들었단다. 그것뿐이라면 평소에도 있던 일이지만 김예리가 “아저씨가 집무실에 들어간 이후로 한번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어.”라고 하는 말까지 들어버렸다. 그리고 현재 시각은 오후 8시 15분. 나야 집무실 안에서 케이크를 잔뜩 집어 먹었기 때문에 배가 부르지만, 아이들이 보기엔 일하느라 점심과 저녁을 거른 것으로 착각할 만한 상황이었다.
이야기가 끝나자 케루는 고개를 푹 숙였고 쓰로는 분하다는 듯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급기야 아이들의 눈가가 붉어지기 시작해서 어쩔 수 없이 티포크를 들었다.
‘와, 시바. 죽겠다. 배 터질 것 같아. 죽겠다, 진짜.’
힘겹게 포크를 움직여 마지막 케이크 조각을 입에 넣었다. 이 녀석들은 내가 케이크를 남김없이 먹는 걸 빠짐없이 지켜봐야 한다는 사명이라도 있는 것처럼 내 얼굴만 바라봤다. 그런 아이들의 앞에는 빵부스러기만 남은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동안 바빠서 다 함께 식사한 지 오래되었으니 이럴 때라도 같이 식사하고 싶다는 감성팔이가 먹혀들었으니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저 무시무시한 케이크들을 전부 먹다가 꼴사납게 토해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마지막 케이크 조각을 목구멍 너머로 넘기자 케루가 자리에서 일어나 의젓하게 인사했다.
“그래…….”
나는 그 한마디만 겨우 내뱉고 손을 흔들어 배웅했다. 아이들이 우르르 나가고 문이 닫히자마자 허리띠를 풀었다. 이제야 조금 살 것 같다.
도미의 희귀 등급 소화제로는 감당할 수 없는 포만감이라 진청이 주고 간 영웅 등급 소화제를 까 먹었다.
“하아.”
어느새 창밖은 해가 져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제 10시가 다 되어가니 2시간만 더 버티면 오늘 하루도 끝이다.
‘그리고 나는 이 케이크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
손님이 더 올 것 같지도 않은데 이만 퇴근해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시발.
“명예추기경. 안에 있는가?”
“바젤 교황님?!”
벌떡 일어나 문을 열자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바젤 할아버지가 인자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손에 들린 상자도.
“교황님께서 어떻게 이런 곳에 직접…….”
“명예추기경을 보러 오는데 대리인을 보낼 순 없지 않은가. 생일이라기에 조촐한 선물을 준비해왔네. 좋은 찻잎도 가져왔으니 함께 들게나.”
바젤 교황은 허허롭게 웃으며 무시무시한 말을 내뱉었다. 그 제안을 거절할 수 없다는 현실이 끔찍했다.
“하하. 영광입니다.”
교황이 직접 타주는 차를 마시는 건 확실히 영광인 일이다. 하지만 달갑지 않았다. 김이 올라오는 홍차와 함께 케이크가 담긴 접시가 내 앞에 놓였기 때문이다.
“좀 더 들게나. 그러다 쓰러질까 참 걱정이 많아.”
“괜…찮습니다.”
바젤 교황이 가져온 건 생크림과 산딸기와 금빛 가루로 장식한 롤케이크였다. 지긋지긋한 생크림. 지긋지긋한 산딸기. 지긋지긋한 금가루.
‘저놈의 금가루는 안 끼는 데가 없어. 린델에서 금광이라도 발견됐나?’
바젤 할아버지와의 만남이 싫은 건 절대 아니다. 예뻐해주고 걱정해주는데 어떻게 싫어할 수 있을까. 다만 지금 상황이 좋지 않을 뿐이었다. 소화제를 먹은 보람도 없이 다시 뱃속에 롤케이크를 밀어 넣었다. 이건 고문이나 다름없다. 마음은 감사하지만, 마음만 받고 싶다.
꾸역꾸역 롤케이크의 3분의 2 정도를 먹어치운 뒤에야 바젤 교황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대로 헤어지려니 참 아쉬운데…….”
“조만간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아쉽다는 말이 빈말은 아니었는지 바젤 교황은 자리에서 일어난 상태로 손을 꼭 붙잡은 채 덕담을 늘어놓았다. 그러다 손거울이 삐빅거리며 울어댈 때가 되어서야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이제 진짜로 퇴근해도 되겠지?’
혹시 몰라 5분 정도 더 기다려 봤지만 손님이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얼른 씻고 자야지.’
머릿속엔 오로지 자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배가 불러서 그런 건지 아니면 사람들을 상대하느라 피로가 쌓였던 건지 몸이 물을 잔뜩 먹은 솜처럼 축 늘어진다.
“하암…….”
늘어지게 하품하며 창없방 안으로 들어가는데 익숙한 얼굴들이 보인다. 혹시 꿈인가? 나도 모르게 잠들었던 건가?
“오, 오빠!”
다짜고짜 품속으로 파고드는 정하얀을 보니 꿈이 아니었다.
“기영 씨. 늦어서 걱정했습니다.”
“하얀아. 현성 씨.”
‘너네가 왜 여기 있어.’
설마 하루종일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예상치 못한 상황에 할 말을 잊었다. 아니, 피곤해서 머리가 안 돌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
“오빠. 마, 많이 피곤해요…? 제, 제가 씨… 씻겨 드릴까요?”
화장실을 힐끔거리는 게 클린 마법으로 씻겨주겠다는 뜻은 아닌 것 같다.
“아니야. 괜찮아.”
은근슬쩍 달라붙는 정하얀을 겨우 떼어놓고 화장실에 혼자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지쳤어…….’
그렇지만 돌이켜보니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케이크를 먹는 건 괴로웠지만.’
뽀득뽀득 씻고 나오니 침대 위에 자리 잡아 잘 준비를 하는 김현성과 정하얀이 보인다. 역시 나와 같이 잠들 생각이었나 보다.
“오… 오빠…! 어, 어서요!”
정하얀이 침대의 한가운데 빈자리를 손바닥으로 팡팡 치며 재촉했다. 원하는 대로 침대에 눕자 김현성과 정하얀이 각자 팔을 끌어안았다. 정하얀은 어깨에 볼까지 비비며 히죽거렸다.
“히힛.”
가만히 있으려니 이제는 김현성마저 밀착해온다. 행복해 보이니 내버려 둘까. 그렇게 눈을 감고 잠들려 하는데…….
“하얀아?”
자그마한 손이 슬그머니 옷 안으로 들어온다. 배꼽 언저리를 쓸던 손은 위로 향할지 아래로 향할지 고민하는 듯 움찔거렸다.
‘옆에 현성이도 있는데 이게 무슨…….’
당황해서 손을 잡아 빼려는데 양팔이 잡혀있어 움직일 수 없었다.
“…현성 씨?”
그런데 이번엔 굳은살이 박여 딱딱한 손이 옷 안으로 들어왔다. 가슴께에 올려진 김현성의 손은 아직도 움찔거리기만 하는 정하얀의 손과 달리 대담하게 움직였다. 유두를 꼬집었다는 뜻이다.
“아, 아니, 잠깐, 하읏…!”
방심한 사이 터져나온 신음에 용기를 얻었는지 정하얀의 손이 속옷 안으로 침투했다. 기세를 몰아가려는 듯 김현성이 양손을 이용해 내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덕분에 김현성에게 붙잡혀있던 팔이 자유를 얻었으나 미약한 근력, 그것도 한 손으로 이 두 녀석을 막아내기란 불가능했다. 그래도 나름 반항하겠다고 몇 번 꿈틀거리다 이내 포기하고 몸에서 힘을 뺐다.
‘그래, 뭐…. 우리 애들이 하고 싶다는데…….’
어쨌든 제법 괜찮은 생일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