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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어치 ( @djcl_gtt )

현성x기영x진청

1. 누구세요?

 

 이기영은 멍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가족 같은 사람들과 즐겁게 생일파티를 하던 도중 난데없이 모르는 얼굴들을 마주하게 되면 누구라도 그런 표정을 지을 것이다. 그것도 눈에 뭐가 들어가서 눈을 부비는 사이에.
‘뭐지? 서프라이즌가?’
이기영의 눈이 주변 풍경을 재빠르게 훑었다.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사람들의 옷차림이 희한했다는 점이었다. 대륙에서 흔히 보던 중세유럽풍 복장들은 어디가고 전부 중국 고전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복식을 하고 있었다. 
근데 서프라이즈를 이렇게 요란하게 하나 보통?
옷만이라면 모를까, 방 안의 장식품과 가구들까지 죄다 그런 식으로 바뀌어 있는 것은 조금 이상했다. 혹여 제가 술에 취했을 가능성도 떠올려보지만 입에 댄 것은 고작 와인 한 모금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이도저도 못하고 있는데 근처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맹주님, 어디 불편하십니까?”
맹주? 
생전 처음 듣는 표현이었지만 이기영은 침착하게 고개를 돌렸다. 일단 돌아가는 상황부터 파악해보자. 결심한 것도 잠시, 마주친 얼굴은 너무 익숙한 얼굴이었다. 반사적으로 말이 튀어나갔다.
“지혜 누나?”
“네?”
누나라뇨? 라고 되묻는 것은 검은백조 길드에 있어야 할 이지혜였다. 아니, 얼굴은 똑같지만 머리가 엄청 긴 데다 분위기도 좀 다른 게...
“누구세요?”
“네?”
아, 이게 아닌데. 
저도 모르게 본심을 내뱉은 이기영은 보고 말았다. 이지혜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치는 것을. 
“연주를 멈추어라!”
이지혜의 일갈에 방 안을 채우고 있던 요상한 동양풍 음악소리가 뚝 그쳤다. 적막이 진득하게 흐르는 공간에 수십 개의 시선이 화살처럼 날아와 꽂혔다.
‘망했네.’
이기영은 등 뒤가 식은땀으로 축축해지는 것을 느꼈다. 모르는 얼굴 틈 사이에 아는 얼굴 하나 있다는 게 이토록 치명적일 줄이야. 순간의 방심으로 호랑이 굴에 뛰어들고 말았지만 이기영은 절망하지 않았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는 법이라고, 기영이는 답을 찾을 것이기 때문이다. 늘 그랬듯이.
잠시 후 방안이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갑자기 맹주가 눈을 감고 쓰러진 것이다. 

 

2. 인피면구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공자의 이름은 이기영이고.”
“네.”
“271차원이란 곳에서 대륙의 안녕을 위해 힘쓰는 와중에 홀연히 이곳에 오게 됐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헌데 이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왜 오게 됐는지도 모른다고요.”
이기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현재 어마어마하게 화려한 침상 위에 앉아 얼굴만 이지혜인 여자에게 심문을 받는 중이었다. 때마침 이기영의 진맥을 마친 의원이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총사님. 이 몸은 틀림없이 맹주님의 몸입니다.”
침상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지혜만이 딱딱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럼 일시적인 착란 증세가 나타난 것이라 봐야합니까?”
“아닙니다. 홧병 증세가 조금 있으시긴 하지만, 머리와 연결된 혈맥들은 깨끗하고 막힘이 없습니다.”
의원의 말인즉슨 자기가 다른 세계에서 온 이기영이라고 주장하는 남자의 정신 상태가 아주 멀쩡하다는 뜻이었다. 신체는 그대로인 상태에서 사람의 알맹이만 바뀔 수 있단 말인가. 고민이 깊어진 이지혜가 인상을 쓰는데, 의원이 그보다 심각한 문제가 있다며 말을 이었다.
“내공이 거의 사라지셨습니다.”
무슨...! 
이지혜가 경악했다. 이기영 사도맹주로 말하자면 각종 기연을 얻은 탓에 웬만한 고수들은 한 손으로 날려버릴 수 있는 막강한 내공의 소유자였다. 멀쩡히 잘 있던 내공이 대체 어디로 갔다는 말인가? 이지혜가 속사포처럼 의문을 쏟아냈다.
“선 의원,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아까는 맹주님의 몸이 맞다고 하셨잖습니까. 산공독 ― 내공을 흩어버리는 독 ― 같은 것에 당하기라도 하셨단 말입니까?”
“제 의원 인생을 걸고 맹세하건대 산공독에 당한 것은 아닙니다. 그저 단전에 남아있는 내기가 적을 뿐입니다. 제 기를 흘려 넣었을 때 반응도 크게 없고요.”
본래 무공을 수련할 때는 기본적으로 단전에 기(氣)를 쌓아 내공(內功)을 다지는 것부터 시작한다. 쌓인 기가 많을수록 다양한 운용이 가능하며, 내공의 수준이 깊을수록 무공의 경지를 높게 쳤다. 내공을 잃는다는 것은 곧 무인으로서의 죽음을 뜻했다.
이지혜는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강호의 정세와 권력구도 같은 것들이 시끄럽게 뒤섞이고 있었다. 이기영을 도와 사파에 계율을 세우고 천하에 안정을 가져왔거늘 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장장 백년을 내다보고 수없이 많은 계획들을 세워놨지만, 그 계획은 무공도 기억도 잃은 이기영을 데리고는 절대 실행할 수는 없는 것들이었다.
천하가 우리를 버렸단 말인가? 황망하게 달려가던 마음이 멎은 것은 저를 차분한 눈길로 보고 있는 이기영 ―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 과 시선이 부딪혔을 때였다.
‘이것 봐라.’
이지혜는 머릿속에 작은 불빛이 켜지는 기분이었다. 잠깐 지켜본 것에 불과하지만 이 이기영은 눈치가 빠르고 뻔뻔한 구석이 있었다. 계속해서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는 한편, 자기에게 불리한 경우는 피하고 유리한 경우는 귀신같이 선점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이기영의 화법과 분위기가 본래의 사도맹주와 무척 닮았다는 점이었다.
이지혜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몇 가지 계획은 이 남자를 데리고도 실행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기영 공자.”
“네?”
“혹시 연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3. 아닌 밤중에 홍두깨

 말발굽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갑작스런 소란에 물건을 흥정하던 이들도 제 갈 길 바쁘던 행인들도 동작을 멈추고 관도를 주시했다. 멀리서 흑마들이 이끄는 마차 여러 대가 줄지어 달려오고 있었다. 윤기가 흐르는 말이며 고급스러운 마차, 기도가 범상치 않은 마부까지 한눈에 봐도 특이한 행렬이었는데, 꼭대기에 맹(盟)이라고 적힌 깃발이 꽂혀 있었다.
대낮부터 객잔에 죽치고 앉아 술을 마시던 이들이 이 위풍당당한 행렬에 흥미진진한 시선을 던졌다. 마차가 완전히 지나가고 나자, 문 제일 가까이 앉아있던 사내 하나가 입을 열었다. 덩치가 산만 한 사내였다.
“군에서 나온 마차인가?”
옆 자리에 앉아 있던 중년의 사내가 말을 받았다. 
“아니, 무림일세. 깃발에 맹이라고 쓰여 있었으니까.”
“아하.”
덩치 큰 사내가 알았다는 듯이 외쳤다.
“그럼 정도맹 ― 정파 연합 ― 이로구먼!”
중년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큰일 날 소리. 검은 말이 마차를 끌었으니 사도맹 ― 사파 연합 ― 의 마차라고 봐야지.”
“사도맹? 사도맹의 마차가 왜 이곳에 왔다는 말이오?”
“그건 나도 잘 모르겠네.”
중년의 사내는 그렇게 대답하면서 술잔을 들어올렸다. 확실히 사도맹이라 하면 이곳에서 말을 타고 며칠을 달려야 하는 거리에 떨어져 있었다. 이 마을에서 가까운 것은 오히려...
“설마 정도맹에게 가는 건가?”
그 말을 던진 것은 덩치 큰 사내와 같은 탁자에 앉아있던 소녀였다. 순식간에 이목이 집중됐지만 소녀는 아랑곳 않고 딱딱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 비무대회. 열리는 중이니까.”
정도맹에서는 3년에 한 번 비무대회가 열린다. 각 문파의 후기지수나 무림의 신진고수들이 자기 기량을 뽐내는 자리로, 며칠 전에 예선대회가 끝나 곧 본선이 열릴 참이었다. 
그때 소녀의 일행으로 보이는 또 다른 남자 하나가 반대 의견을 냈다. 안경을 쓴, 인상이 부드러운 청년이었다.
“소협의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만, 저들은 사파입니다.”
사파가 정파 행사에 참여할 리가 없지요. 정도맹 측에서 허락을 해줄 지도 의문이고요. 
청년의 말에 동조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그런데 뜻밖에도 상황을 관전하고 있던 중년의 사내가 말했다.
“음, 우리 생각이 틀릴 수도 있지.”
“예?”
“모두 잘 생각해보시오. 아주 옛날이라면 모르겠지만 작금의 정도맹과 사도맹의 사이가 그리 나쁘지만은 않잖소? 이 기회에 친목을 다지려고 하는지도 모르오.”
중년 사내의 말에 객잔이 술렁였다. 삼십 년 전 사건 이후 정도맹과 사도맹이 서로 으르렁대는 일은 없었으나, 그렇다고 세간에 드러내놓고 교류한 적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명색이 한쪽은 정파, 한쪽은 사파니까. 
하지만 만약 중년 사내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번 비무대회는 틀림없이 무림역사에 한 획을 긋는 일이 될 터였다.
“이거 어쩌면 우리가 역사적인 순간에 동참하게 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안경 쓴 청년의 중얼거림에 덩치 큰 사내가 호기롭게 외쳤다.
“그럼 이번 대회에 참여하면 사파놈들과 한판 붙을 수 있다는 뜻이군!”
이번엔 소녀가 눈을 반짝이면서 대꾸했다.
“듣던 중 반가운 말이야. 사파놈들에게 내 검을 맛보여 줄 수 있다니. 벌써 기분이 좋아.”
“소협, 그렇게 말하면 너무 사파 같습니다.”
안경 청년이 그 말을 할 때쯤, 객잔은 저마다의 추측으로 소란해지고 있었다.

 

4. 한 권으로 읽는 무림

 객잔에서 파란이 일 동안 달리는 마차에서는 지친 목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황하는 그 누런 강물 이남으로 수많은 영웅들을 쏟아 내왔다. 영웅이라 하면 대부분 왕이나 황제의 이야기를 떠올리겠으나, 조정의 시선이 닿지 않는 강호에도 셀 수 없이 많은 호걸이 존재했다. 이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기를 쌓고 무술을 익혀 초월적인 힘을 내곤 했는데, 사람들은 이들을 한데 묶어서 무림(武林)이라고 불렀다.”
“...”
“무림은 크게 두 세력으로 양분되었으니, 하나는 도(道)와 의(義)에 이르고자 무공을 갈고닦는 정파(正派)요, 다른 하나는 개인의 야망을 이루고자 무공을 갈고닦는 사파(邪派)였다. 본디 정파와 사파는 물과 기름 같은 존재였으나, 삼십 년 전 마교의 등장으로 중원이 화에 휩싸이자... 저, 잠깐 쉬었다 가면 안 됩니까?”
서류에 붙박여 있다시피 하던 이지혜의 눈이 천천히 위를 향한 것은 그때였다. 이지혜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한 손엔 책, 한 손엔 머리를 움켜쥔 이기영이었다.
“마차를 멈춰달라는 말씀입니까? 아니면 책읽기를 멈추시겠다는 말씀입니까?”
“둘 다요.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읽으려니 토할 것 같습니다.”
이기영이 지끈대는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말했다. 꾀를 부리는 게 아니라 진짜 십초에 한 번씩 속이 울렁댔다. 미친 듯이 달리는 마차는 그야말로 승차감의 밑바닥이 무엇인지 화끈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흠.”
잠시 이기영을 살피던 이지혜가 냉담하게 말했다.
“맹주님의 몸이니 그 정도는 견디실 수 있을 겁니다. 지금 진짜 문제가 뭔 줄 아십니까? 정도맹 도착까지 겨우 이틀이 남았다는 겁니다.”
이틀! 
그 말에 이기영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마차가 위아래 좌우 양옆으로 어찌나 신나게 쉐이킹을 해대는지 앉은 지 삼십분 만에 엉덩이가 배겼고, 그 상태로 사흘 밤낮을 달려 온 참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틀이나 더 가야 한다니? 그것도 책을 읽으면서? 이기영이 충격과 공포에 빠지거나 말거나 이지혜는 평이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초반에 미리 말씀 드렸을 텐데요? 제 시간에 도착하려면 숙식을 해결할 때 외에는 계속 달려야 합니다. 괜히 마차 멈췄다가 늦으면 분위기가 아주 볼만해질 겁니다. 정도맹 측에서 사도맹이 우리를 얕보니 뭐니, 역시 친교가 백년은 일렀느니 어쩌니... 정녕 그런 말을 듣기를 원하십니까?”
“아니, 그건 아니지만...” 
숨도 쉬지 않고 쏘아붙이는 이지혜의 말에 이기영의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이기영이 이곳에 온지 몇 시간 만에 깨달은 것이 있다면, 대륙의 이지혜나 이 세계의 이지혜나 일처리에 있어서는 지독할 만큼 완벽을 추구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대륙 지혜 누나는 자기가 아프다 하면 스케줄을 어떻게든 빼주려 했는데. 여긴 뭐 인정사정없었다. 
“그리고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정도맹 사람들을 만나기 전까지 지금 읽고 계신 <한 권으로 읽는 무림>을 한 구절도 빼놓지 않고 외우셔야 합니다. 비무대회를 하는 동안 매일 얼굴 맞대고 하하호호 해야 하는데 맹주님 몸을 하고서 천치처럼 앉아계신 꼴은 절대 못 봅니다.”
“저도 그렇게 있을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책을 꼭 소리 내어 읽어야 합니까?”
“네.”
단호한 대답에 이기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지혜가 왜 이리 엄격하게 구는지 그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지금 사도맹은 백년지계의 첫 단추를 꿰기 위해, 그러니까 무림의 평화를 지키기 위한 첫 발걸음을 내딛는 중이었다. 올해는 초대 받는 형태로 참가하지만 앞으로는 정기적으로 정사파간 친선비무를 주최할 것이고, 나중에는 표국 ― 운송・경비업체 ― 이나 객잔을 운영하며 공동사업도 벌일 예정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이 계획들이 전부 이기영 본인을 끼지 않고는 일처리가 불가능하게 구상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 이지혜 총사의 말에 따르면 사도맹주 이기영은 일중독자였다 ― . 덕분에 이기영은 일주일 동안 이 세계에 적응함과 동시에 본체를 따라잡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했다. 
매일 지도를 펼쳐놓고 각 문파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 대략적인 전력, 문파 간 세력구도를 외웠으며, 그 후에는 최근 강호에서 득세한 단체의 이름과 각 문파 수뇌부의 명단을 통째로 외웠다. 쉬는 시간마다 짬을 내 무공에 관한 책 열 권을 독파한 것은 물론이었다.
결과적으로 일주일 내내 심한 수면부족에 시달리긴 했지만 이기영은 나름 만족했다. 어쨌든 원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찾을 때까지는 이곳에서 제힘으로 살아남을 생각이었으니까. 걱정이 되는 게 딱 하나 있다면 ‘원래 이 세계의 이기영’은 어디로 갔을까 하는 것이었다. 짐작하기로는 제가 있던 271차원으로 가서 제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을 것 같지만...
‘거기서 깽판이라도 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깽판을 치고 있어도 막을 방도가 없으니 더 환장할 노릇이었다. 하지만 걱정해봐야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기영은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며 책을 집어 들었다. 이 난감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서 그나마 다행스러운 사실은 한자로 된 책을 막힘없이 읽어 내려갈 수 있다는 점이었다. 아무래도 차원을 이동하면 저절로 한글패치가 이루어지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 이기영은 다음 구절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마교의 등장으로 중원이 화에 휩싸이자, 정도맹과 사도맹은 한 마음으로 단결하여 함께 마교에 맞섰다.”

 

5. 편지 왔어요

「정도맹주께 삼가 안부를 아룁니다.
천지에 생기가 감도는 때에, 귀맹께서 비무대회를 여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천하의 고수들이 자웅을 겨루는 광경은 천만금을 주어도 쉽게 볼 수 없는 것,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견식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어, 직접 보고 배움을 얻을 기회를 청합니다.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비무를 관람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기 바랍니다. 
사도맹주, 이기영」

 “진 군사.”
“예, 맹주님.”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인가?”
정도맹의 군사 진청이 맹주의 손에 들린 서신을 흘긋 내려다보고 대답했다.
“아닙니다.”
“좋아, 그러면 이건 누가 장난을 친 것이로군. 그렇지?”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마지막에 찍힌 문장의 모양... 틀림없이 사도맹에서 온 서신이 맞습니다.”
“허.”
맹주가 탁자에 서신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살다 보니 별 일을 다 겪는군.”
진청은 대답하는 대신 허리를 살짝 더 숙였다. 솔직히 말하면 그도 적잖이 당황한 상태였다
“진 군사는 이게 무슨 의미라고 생각하나?”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면 사도맹에서 손을 내민 것이고, 꼬아서 생각한다면 염탐을 노리는 것입니다만, 후자일 가능성은 적습니다.”
“왜?”
“최근 마교가 다시 등장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니 사도맹도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겠지요. 그중에서 가장 안전한 방법은 저희와 동맹을 맺는 일일 겁니다.”
맹주는 잠시 말이 없었다. 진청의 이야기가 그럴 듯 했다. 두 맹 사이에 분쟁이 없은지도 꽤 오랜 세월이다. 동맹제안이 아주 생뚱맞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의아하기는 했다. 분쟁이고 자시고 서로 엮이는 일 자체가 없었으니까. 굳이 묘사하자면 둘은 소 닭 보듯 하는 관계였다.
“새로 사도맹주 된 자가 특이하다는 소문을 듣긴 했지만...”
맹주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마교라는 이름이 주는 공포가 있다. 교주를 살아있는 신(神)으로 받드는 피에 미친 마귀들이 삼십년 전 중원에 등장했을 때, 그들의 칼에 얼마나 많은 무인이 죽었는지 모른다. 정파 사파 할 것 없이 시체가 산을 이루었고, 피가 강물이 되어 흘렀다. 맹주의 기억으로는, 정도맹에 소속된 문파 대부분이 수뇌를 잃었고 사도맹도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것으로 안다. 
그 혈겁을 기억하는 이가 사도맹에도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이리 선뜻 손을 내밀 줄이야. 
골똘히 생각에 빠져있는 맹주의 앞으로 누군가가 나섰다.
“사부님.”
“음?”
맹주의 시선이 젊은 사내에게 향했다. 사내는 헌앙한 풍채에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청수한 미남이었다.
“왜 그러느냐, 현성아?”
“요청을 받아들이실 겁니까?”
맹주가 되물었다.
“너라면 어찌하고 싶은데?”
“당연히 거절할 것입니다.”
맹주가 흥미롭다는 듯이 물었다.
“왜?”
“이곳은 정파의 정신을 상징하는 곳입니다. 배움이니 뭐니 하는 번드르르 한 말들을 갖다 붙이고 있지만 정도를 걷지 않는 자들을 들일 수는 없습니다.”
어지간히 맘에 들지 않는 것인지 김현성이 일순 미간을 찡그렸다가 말을 이었다.
“이름에 사(邪) 자가 들어가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들입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상냥한 양처럼 굴다가도 언제든 이리나 승냥이로 돌변할 자들이지요. 무엇보다 한 번 허가하면 앞으로 더한 것을 요구할까 염려됩니다.”
“저들을 믿을 수 없다는 말이로구나.”
맹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옳아, 본질은 변하지 않는 것이지. 그럼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맹주의 물음이 이번엔 진청에게 향했다. 진청이 가볍게 공수자세를 취하고 대답했다.
“들여야지요.”
“진 군사님!”
“자네의 말도 일리가 있다만 이건 어떻게 보면 기회일세.”
진청이 잠시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맹주님,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삼십년의 침묵을 깨고 내민 손이 칼자루를 쥐고 있는지 돈자루를 쥐고 있는지는 직접 겪어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들의 태도가 좋다면 그들의 진심을 확인한 것이고, 태도가 수상하다면 그 또한 그들의 진심을 확인한 것이니까요.”
“만약 꿍꿍이가 있는 것이라면? 그래서 우리 전력이 노출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할 텐가?”
“이 비무대회가 정도맹의 이름을 걸고 있긴 하지만 정도맹에 속하지 않은 개인이나 단체도 참여하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애초에 전력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간혹 뛰어난 고수가 있다면 뒷선에서 접촉해 고용하는 정도겠지요.”
진청의 말을 듣던 맹주가 대꾸했다.
“하기야 사도맹주가 정도맹 한복판에서 일을 칠 만큼 미련한 자는 아닐 게야. 좋다, 총관.”
“예.”
구석에 있던 키 작은 남자 하나가 조르르 걸어 나왔다.
“먹을 가져다주게. 사도맹주에게 답신을 보내야겠어. 본맹은 사도맹을 환영한다고.”
“사부님!”
“현성아.”
맹주가 무심하게 말했다.
“맹주란 대의보다도 맹의 이익을 따질 줄 알아야 한다. 물론 적당히 선을 지키기는 해야 하지만 말이야.”
“허나 떠들기 좋아하는 자들이 맹을 헐뜯을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늘 남 욕할 궁리만 하는 자들이야. 길게 보면 정도맹이 사파까지 품었다하여 진정한 백도로서 이름을 드높이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너는 걱정 말고 비무에 집중하거라.”
이번에 너에게 기대가 커. 세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맹주의 말에 김현성이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6. 중앙연무장에서 생긴 일

 문파의 위용을 보려면 그 문파의 연무장을 보라는 말이 있다. 연무장이 얼마나 큰지, 얼마나 자주 사용되는지 정도만 봐도 문파의 흥망성쇠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도맹의 위세는 중원 제일이었다. 서른 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연무장만 여섯, 삼백 명이 동시에 뛰어놀아도 되는 중앙연무장이 하나였으니까. 그리고 지금 그 중앙연무장은 대회에 참가하러 온 이들과 구경꾼들로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대체 언제 시작하는 거야? 한 시진 전부터. 기다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들려온 미성에 주위에서 시선이 날아들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눈매가 날카로운 소녀였는데, 호기심 어린 눈들이 머물렀다가 옆에 선 커다란 덩치의 남자와 안경 쓴 청년을 보고는 도로 거둬졌다.
“개회식 기다리다 날 새겠구먼.”
“정말 그럴 지도 모르겠습니다. 약간 지치네요.”
남자와 청년이 차례로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무덤덤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비무대회에서는 의례 있는 일입니다. 세분 다 첫 출전이신가 보군요.”
“뭐요?”
첫 출전이냐는 말이 묘하게 자존심을 긁었다. 재빨리 뒤를 도는 그들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기다란 창을 들고 서 있는 여인이었다. 푸른 술이 달린 창과 질끈 올려 묶은 머리, 단정한 미인형의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그 순간 주변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신창(神槍)이다!”
“신창도 이번 대회에 출전한다고?”
“볼 만 하겠는데!”
신창?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일행이 눈을 찌푸리며 기억을 떠올리려 애쓰는 사이, 여인이 가볍게 포권을 취하며 인사했다.
“기분 상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저는 조혜진이라고 합니다.”

***

 바로 그 시각, 이기영의 일행도 중앙연무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맹주님, 이쪽으로.”
이지혜가 이기영보다 앞서 걸으며 길을 안내했다. 이기영이 멱리를 쓰고 있는 탓에 시야가 좁아서였다.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는 이기영의 뒤로 호위무사가 바짝 따랐다. 처음에 이 호위무사도 아는 얼굴이어서 얼마나 놀랐던지. 그런 생각을 하는 이기영의 눈에 연무장 바닥이 들어왔다.
‘돈을 처벌랐군.’
이기영이 그런 평가를 내린 것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넓은 바닥이 전부 판석으로 뒤덮여 있어서였다. 마법도 없고 지구 같은 기술도 없는 주제에 이만한 넓이를 다 돌로 덮었다? 이건 사람을 갈아 넣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석공들을 고용했을 테니 사람 대신 돈이 미친 듯이 깨졌을 거고.
파란의 안주인으로 있으면서 온갖 살림을 도맡아했던 저력을 잠시 뽐낸 이기영이 이번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얼씨구. 양쪽엔 고층건물을 세웠어?’
네모난 연무장의 동편과 서편에 각각 3층짜리 누각이 보였다. 어째 좀 휘황찬란한 것 같은데.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자, 옆에서 이지혜가 말을 걸어왔다.
“저희는 동쪽에 있는 누각으로 가면 됩니다.”
[두 누각 다 나름 영향력 있는 문파의 수장들만 출입이 가능합니다. 귀빈용 관람석이라고 할 수 있지요. 사실 정파 문파들 사이에서도 돈지랄이라고 욕을 먹었다고 합니다.]
이기영이 잠깐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총사, 그게 사실이더라도 그런 말은 좀 삼가는 게.. 무림인들은 귀가 좋다면서요. 정도맹 애들이 들으면 황당할 텐데.”
[전음입니다, 공자.]
[...진작 말해주죠.]
전음이란 내공을 활용해 멀리 떨어진 상대에게 음성을 전달하는 기술로, 타인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책에서 보고 연습도 몇 번 했지만 아직 익숙지가 않은 탓에 실수를 했다. 민망한 마음에 걸음을 빨리하자 뒤에서 이지혜가 천천히 가시라며 타박했다. 
하여튼 여기 지혜 누나는 내 맘을 너무 몰라줘. 
속으로 툴툴대는 것도 잠깐이었다. 누각에 들어서자마자 보인 끝이 없는 계단에 이기영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이거.. 설마 3층까지 올라가야 됩니까?”
이지혜가 웃었다.
“싫으면 여기 계시던가요.”
이기영이 말이 없자 호위무사가 물었다.
“업어드릴까요?”
이기영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맹주 체면에 그럴 수 있을 리가 있나. 얕게 한숨을 내쉰 이기영이 비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갑시다.”
계단지옥의 끝에는 정도맹주가 있을 터였다. 

 

7. 다 뜻이 있다

 개회식은 다소 싱겁게 흘러갔다. 적어도 이기영의 입장에서는 그랬다. 엄청나게 화려한 볼거리를 기대한 건 아니지만 하다못해 칼춤이라도 춰줄 줄 알았는데, 주최자인 정도맹주가 나와서 몇 마디 하는 게 땡인 모양이었다.
개회사 내용도 아주 뻔했다. 예로부터 무인은 무(武)를 통해 진리에 이르고 싶어했다느니, 선대들이 보기에 부끄럽지 않은 무인이 되자느니... 나쁘지는 않았으나 참신함이 제로였다. 결국 집중력이 흐트러진 이기영이 뒤에 서 있던 이지혜에게 전음을 보냈다.
[이거 잠깐 벗어도 되지 않아요? 거추장스러운데.]
이기영이 말한 ‘이거’란 마차에서 내린 후부터 한 번도 벗지 않은 멱리를 말했다. 얇은 삿갓 주위로 둘러진 흰색 천이 허리께까지 내려와 얼굴을 완벽히 가리고 있었는데, 대륙에서 썼던 사제용 베일과 비슷하게 반투명하면서 좀 더 두꺼웠다. 
‘안에서는 바깥이 보이지만 바깥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지.’
이기영은 그런 생각을 하며 한손으로 천을 살짝 걷어냈다. 빼꼼히 트인 시야에 개회사를 하고 있는 정도맹주의 뒷모습이 보였다. 고개를 슬쩍 옆으로 돌리니 문파의 장문인들과 세가의 가주들이 엄숙한 얼굴을 하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얼굴들이 초상화랑 흡사하네.’
그건 정말 다행이었다. 얼굴을 못 알아보면 명단을 외운 것도 소용없으니까. 그때 이지혜에게서 전음이 날아들었다. 
[얼굴 가리세요. 극적인 효과, 잊었어요?]
이 누나 진짜 철두철미하다니까. 천을 붙잡고 있던 이기영의 손이 도로 무릎으로 내려갔다. 다시 불투명해진 시야 사이로 이기영은 마차에서 이지혜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근데 너무 허옇게 입고 가는 거 아닙니까? 하늘하늘한 흰옷에, 하얀 멱리에.’
‘그러면 안 됩니까?’
‘그냥 궁금해서요. 이러면 맹주의 위엄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맥아리 없어 보일 것 같은데.’
‘이번 정도맹에서의 행보는 기존의 부정적인 사파의 이미지를 벗는 게 핵심입니다. 최대한 무해하게 보일 것. 마음은 굳건하지만 연약해서 지켜주고픈 마음이 들게 할 것. 이게 설정이니까 기억해 두세요.’
그렇다. 멱리를 쓰고 온 것도 어디까지나 전략이다. 적절한 타이밍에 벗기 위해서는 신호가 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신호를 주는 것은 바로...
“오늘 아주 특별한 손님이 오셨기에 여러분께 소개를 드리고자 합니다.”
정도맹주였다. 

***

 이기영은 누각에 있던 모두가 저를 돌아보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도맹주의 옆으로 걸어가 서자 시야가 탁 트이면서 연무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수백 쌍의 눈동자가 대부분 적의를 담고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기분이 별로군.’
대륙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던 광경인지라 신선함마저 느껴졌다. 이기영은 잠시 목을 가다듬으면서 수십 번도 더 연습한 멘트를 떠올렸다.
나는 사도맹주 이기영. 여기는 정도맹. 오늘 이기영은... 좁은 사파의 세계에 갇혀 있다가 처음으로 눈부신 정파의 세상에 발을 디뎠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사도맹주 이기영이라고 합니다.”
내공을 불어넣은 탓에 한층 증폭된 부드러운 미성이 멱리 밖으로 흘러나왔다. 
“저 덩치로 사도맹주라고?”
“목소리가 젊은 걸.”
“가짜 아냐?”
말 한마디 했을 뿐인데 얹는 말들이 많았다. 누군가는 이렇게 외쳤다.
“얼굴을 보이쇼! 정도맹에 왔으면 얼굴을 밝혀야지!”
무례한 요청이 삽시간에 들불처럼 군중으로 번졌다. 여기저기서 과격한 목소리로 맞장구를 치는 자들도 있었다. 상황이 심상찮아지자 누각 안은 문파 수뇌부들의 헛기침으로 가득 찼다. 그들이라고 이기영이 반가운 것은 아니었지만 손님을 모셔다 놓고 보일 광경은 아니었다. 
“진정시킬까요?”
사태를 관망하던 진청이 정도맹주에게 다가와 은근히 물었다. 정도맹주는 가볍게 고개를 젓고 흥미진진한 눈으로 이기영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나오시겠소, 이기영 맹주.’
속으로 던진 질문에 응답이라도 하듯, 멱리 아래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럴까요?”
예상보다 훨씬 차분한 목소리였다. 동시에 이기영의 손이 멱리의 천을 천천히 걷어 올렸다. 

 

8. 군사님 군사님 낯선 군사님

 이기영이 사도맹주가 된 지는 거의 10년이지만, 이기영의 얼굴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데다 외출을 할 때마다 멱리를 써서 얼굴을 꼭꼭 가렸기 때문이다. 
얼굴에 끔찍한 상처가 있을 것이다, 지독하게 못생긴 추남일 것이다, 주화입마의 부작용으로 얼굴이 삐뚤어진 것이다... 
수많은 추측이 오고갔지만 결국 다 카더라에 불과한 이야기였다. 정보통으로 알아주는 개방이나 하오문에서도 이기영의 초상화를 구하려고 애썼지만 번번이 실패했다고 했다. 진청이 들은 사도맹주의 외모에 대한 소문은 그게 전부였다.
그러나 흩날리는 흰 천과 봄날의 햇살 속에 요염한 얼굴이 드러났을 때, 진청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니, 저뿐만 아니라 연무장 전체가 고요에 잠겼다. 어디선가 숨죽인 탄성이 들린 듯도 했다.
“이럴 수가 내가 지금 잘못 봤는가? 방금 서시를 본 것 같은데.”
“이 사람아, 초선이었어!”
한쪽에서는 경국지색이라 일컫는 미인들의 이름이 튀어나왔고,
“맹주란 자고로 무공이 뛰어나야 하는 법인데,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영 힘을 못 쓰게 생겼구먼.”
“그 힘이 혹시 밤에 쓰는 힘인가?”
“예끼 이 사람아!”
다른 쪽에서는 음담패설이 튀어나왔다. 
‘정파라는 놈들이 시정잡배나 다를 바 없군.’
진청은 속으로 혀를 차면서 물끄러미 이 소란의 중심인 인물을 바라보았다. 젊은 사도맹주는 그저 모든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처럼 조용히 미소만 띠고 서 있었다. 어떤 기품마저 풍기는 모습을 보며, 진청은 그의 앞에서는 여인이건 사내건 현혹당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

 [괜찮았어요?]
[완벽했습니다. 얼굴 공개 시기도 적절했고 인사말 반응도 뜨거웠어요. 호불호가 갈리긴 했지만.] 
[논란의 불씨를 지폈다는 데 의의를 두죠.]
[그렇죠. ‘절대 상종해선 안 될 악인’ 여론에서 찬반 논쟁으로 들어섰다? 이미 끝난 겁니다.]
[...우리 이미지 그 정도로 나빴어요?]
첫 일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숙소로 향하는 길, 이지혜와 전음을 주고받던 이기영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까 정파놈들의 까닭 없는 악의도 그렇고, 이지혜의 평가도 그렇고. 아무래도 사파라는 것들은 답도 없는 인간말종인 모양이었다. 
이쯤되니 자연스레 궁금증이 도졌다. 그럼 사파의 수장이라는 이 세계의 이기영은 얼마나 악독한 놈인 걸까? 설마 1기영과 맞먹는 수준인가?
그때 앞서가던 안내원이 발걸음을 멈췄다. 웬 대문 앞이었다. 
안내원이 공손히 말했다.
“사도맹의 총사께서는 여기 머무르시면 됩니다.”
활짝 열린 대문 안쪽으로 사방을 둘러싼 전각이 보였다. 마당에는 작은 화원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마침 그곳에서 꽃을 들여다보고 있던 남자 하나가 이기영과 일행을 보고는 웃으며 다가왔다. 남자는 이기영을 향해 가볍게 허리를 숙이면서 인사했다.
“정도맹의 군사가 사도맹주를 뵙습니다.”
아. 
이기영은 마주 인사하는 것도 잊고 눈만 깜빡였다. 이 여자 꽤나 호리게 생긴, 반반한데다 이지적인 외모의 미남자는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검은 머리를 하고 있다는 점일까.
‘그러고 보면 원래는 검은 머리였지.’
이제는 많이 흐려진 첫인상이다. 이기영은 소매를 들어 살짝 입가를 가렸다. 반가워서 웃음이 자꾸 나왔다. 이런 말을 하긴 좀 그렇지만... 가슴이 살짝 떨릴 만큼 좋았다.
‘내가 군사님 보고 이런 감정을 느낄 줄은 몰랐는데.’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진청이 의아한 시선으로 이쪽을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너무 넋을 놓고 있었나 싶었다.
“큼, 반갑습니다, 진청 군사님.”
“...저를 아셨던가요?”
“네?”
뭔 소리야. 당연히 이름 정도는... 
아.
이기영은 그제야 자기가 남의 회사에 가서 지나가던 직원의 이름을 한방에 맞춰버리는 짓을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제는 이게 이지혜가 보기에도 굉장히 요상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지혜가 건네준 명단에 진청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다 정도맹이랑 내통했다는 취급받게 생겼네.’
하지만 뱉은 말을 수습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기영은 그냥 말머리를 돌리기로 했다.
“여기는 어떤 곳입니까?”
진청이 이기영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묻고 싶은 게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는데, 우선은 그냥 넘어가주기로 한 모양이었다. 
“이곳은 귀빈의 수행원으로 온 자들이 머무는 곳입니다. 제 거처는 따로 있습니다만, 비무대회 기간 동안은 함께 머물면서 손님들께 불편함이 없으시도록 할 예정입니다.”
“그렇군요. 수고가 많으세요.”
“수고랄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당연한 일인 것을요.”
진청이 빙긋 웃었다. 이기영은 그걸 보면서 약간 소름이 끼쳤다. 
‘웃어?’
비웃음이 아니라 멀쩡한 웃음 ― 물론 접대용 미소겠지만 ― 을 던지는 진 군사라니 뭔가 잘못 되어도 단단히 잘못 됐다. 아니, 나만 보면 화내고 틱틱 대던 진 군사 어디 갔어? 기분이 이상해서 말없이 있으려니 진청이 안내원에게 슬쩍 눈짓하는 게 보였다.
“먼 길 오시느라 고되실 텐데, 총사님은 여기 맡기시고 어서 가서 쉬시지요.”
“아, 네.”
여유로운 말투가 축객령인 듯 배려인 듯 아리까리했다. 내가 알던 진 군사님이라면 백퍼센트 축객령인데, 이쪽 군사님은 잘 모르겠네. 이기영은 속으로 입을 쩝 다시면서 이지혜에게 인사했다.
“그럼 푹 쉬고 있으세요, 총사.”
“예, 맹주님. 내일 뵙겠습니다.”
“아, 그리고...”
이기영이 진청을 쳐다보았다.
“나중에 차나 한 잔 했으면 좋겠습니다, 군사님.”
진청이 약간 놀란 눈을 했다가, 이내 알겠노라고 대답했다.

 

9. 너구나

 이기영은 이지혜와 헤어지고 한참을 걸어간 끝에 숙소에 도착했다. 정도맹주가 각별히 신경 써서 내준 곳이라더니 과연 전경부터가 남달랐다. 단지 아쉬운 게 있다면...
“연무장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이군요.”
“예. 연무장과 가까우면 아무래도 소란스럽다 보니.”
안내원이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었지만 이기영은 웃을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비무를 보러 갈 때마다 격렬한 걷기 운동을 해야 할 판이었다. 
사실 지금도 거의 네 발로 기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있는 것이다. 얼마 없는 내공을 팍팍 써가며 연설하고, 정파의 늙은이들과 일일이 인사치레하고, 그것도 모자라 오늘자 대진표에 있는 비무를 모조리 관람하고 온 부작용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걷고 또 걷다보니 ‘이거 나 엿 먹이려고 수작 부린 거 아냐?’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 건 당연했다. 
물론 다른 가능성도 있었다.
“자랑하고 싶었다든지...”
“예?”
“아무것도 아닙니다.”
눈을 동그랗게 뜨는 안내원에게 그저 혼잣말이었을 뿐이라고 친절히 말해주며 이기영은 여기까지 걸어오면서 본 것들을 떠올렸다. 
비단잉어가 떼 지어 노니는 연못, 색색의 꽃들로 화려한 화원. 무성하게 우거진 대나무숲... 심지어 어떤 곳은 작은 시내를 흐르게 해놓고 그 위로 정자를 세운 곳도 있었다. 
너무 호사스러워서 여기가 정도맹인지 테마파크인지 헷갈릴 즈음에야 간신히 숙소 문턱을 밟았으니,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영 무리는 아니었다. 다소 지친 표정으로 제가 머물 곳을 휘휘 돌아보던 이기영이 물었다.
“여긴 저 혼자 사용합니까?”
“예. 맹주님께서 그 편이 더 편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건 그래. 
이기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개회식 때 느낀 거지만 여기 사람들은 사파라는 단어 하나로도 흥분지수가 높아지는 모양이었다. 얼굴 봐서 피차 좋을 게 없으니 특별실이라는 이름으로 격리해놓는 게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럼 안쪽의 안내를...”
“아, 괜찮습니다.”
“예?”
“여기까지 데려다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제가 천천히 둘러볼 테니 이만 가서 쉬도록 하세요.”
“그럴 수는...”
제발 가. 나 힘들어. 
아까부터 다리가 후들대는 게 더 있다가는 진짜 바닥에 주저앉을 것 같았다. 안내원을 바라보면서 나 지금 혼자 있고 싶다는 눈빛을 강력히 쏘아 보내자, 안내원은 푹 쉬시라며 황급히 인사를 건네고 사라졌다.
‘다행히 눈치가 없진 않군.’
이기영은 짤막한 한숨을 내쉬면서 전각으로 들어섰다. 일단은 좀 자고 나서 움직일 생각이었다.

***

 이지혜 총사가 한 가지 모르는 사실이 있다면, 알맹이가 뒤바뀐 사도맹주 이기영에게는 마음의 눈이라는 특수한 능력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기영은 마음의 눈이 작동한다는 것을 알자마자 다방면에서 알차게 써먹었는데, 특히 빛을 발한 것은 정도맹에 온 후였다. 정파 수뇌부들의 이름을 맞추는 데에도 유용했거니와 비무대회 승패마저 점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상태창의 내용이 대륙에서와 완전히 똑같지 않다는 점은 흥미로웠다. 이름, 칭호, 나이, 특성 등은 기존과 똑같았지만 능력치 부분에서는 몇몇 스탯의 명칭이 달라져 있었는데, 내구 스탯은 외공 스탯으로, 마력 스탯은 내공 스탯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기영의 눈앞에 나타난 남자로 말할 것 같으면 그 누구보다 화려한 상태창을 자랑하고 있었다.
‘외공 스탯 60에 내공 스탯 70...’
이 정도면 비무대회 참가자들 중에 단연코 일등이다. 물론 개회식 때 본 정파 늙은이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젊은 나이에 이 정도 성취를 이뤘다는 것은 타고난 무재라는 뜻이었다. 
이기영은 속으로 순수하게 감탄하면서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불공평하게도 외모마저 입이 벌어질 만큼 뛰어난 그는 찬찬히 포권을 하며 인사해왔다.
“김현성이라고 합니다.”
이기영은 오랜만에 보는 그리운 얼굴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남자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얼어붙어 있어서 더 그럴지도 몰랐다.

 

10. 왜 내 맘을 흔드는 건데

 “날이 무척 좋군요.”
멱리를 벗고 얼굴을 드러낸 사도맹주의 첫마디는 그랬다.
“정파 여러분을 처음으로 마주하는 자리라 기대를 많이 했었는데, 하늘도 제 기분을 알아주시는 것 같습니다.” 
빙그레 미소 짓는 모습에 사방이 밝아지는 듯 했다. 김현성은 가슴이 답답해져서 주먹을 꽉 쥐었다가 폈다. 제가 초조해하거나 말거나 사도맹주의 목소리는 계속됐다.
“오늘 저는, 사파인으로서가 아니라 무(武)를 익히는 한 사람의 학도로서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물론 사파 주제에 어찌 정파에게 배움을 청하는가 의아하실 수 있습니다. 예, 저와 여러분이 익히는 무학의 궤는 다르지요. 하지만 여러분의 무기에 서린 웅혼한 기운과 정상에 서고자 하는 치열함은, 분명 제가 겪어보지도, 겪어볼 수도 없는 깨달음을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낭랑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얼어붙은 마음에 봄비처럼 내리고 있었다. 근처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서도 얼음 부스러기가 떨어져 내리는 것이 보였다. 김현성은 머릿속을 유영하는, 뱀처럼 꿈틀대는 단어들을 잡아 뽑으려고 애썼지만 잘 되지 않았다. 
‘저게 진심일 것 같아?’
마음 한편에서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또 속기는. 멍청한 놈.’
김현성은 금방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알아챘다. 그것은 과거의 김현성이다.
‘어린 네게 일자리를 소개해주겠다고 해놓고선 검투장에 팔아버렸던 사파놈들도 딱 저랬었지. 웃음을 띠고, 사람을 살살 어르는 목소리로.’
김현성은 그렇게 무려 십 년을 불법 검투장의 노예로 살았다. 당장 내일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김현성을 강하게 만들었고, 한편으로는 미치게 만들었다. 우연히 길을 지나던 정도맹주가 그를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김현성은 지금도 그 검투장에 갇혀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진작 죽었거나.
뱀 같은 새끼. 
까드득 하는 소리가 잇새로 새어나왔다. 짐승보다 못한 놈들이 모인 것이 사파의 소굴이고, 이기영은 그놈들의 수장이었다. 달콤한 말을 할 줄 아는 것을 보니 혀가 두 갈래로 갈라진 독사임이 틀림없다. 김현성은 이기영의 혀를 잡아 뽑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눈을 지그시 감았다. 마지막 말을 뱉는 이기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러분도 저도 무(武) 한 글자를 깨우칠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럼 행운을 빕니다.”
눈을 뜨자 가볍게 포권을 취하고 물러가는 사도맹주가 보였다. 그 동작마저 고상하기 짝이 없어서, 가슴이 차갑게 식었다. 

***

 “우아아아!!!!”
연무장이 함성으로 터져나갈 듯 했다. 방금 전 차기 검왕의 재목이라는 남궁세가 검수의 검을 부러뜨린 것은 정도맹주의 하나뿐인 제자였다. 김현성은 부러진 검을 망연히 쳐다보고 있는 남자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몸을 돌려 제 스승이 있을 누각을 올려다보았다. 서릿발처럼 엄한 두 눈과 마주치자마자 귓가에 전음이 날아들었다. 
[검 끝에 잡생각이 묻었구나. 하마터면 피를 볼 뻔했어.]
[죄송합니다.]
[사도맹주 때문이냐?]
김현성은 변명하지 않았다.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맹주가 혀를 찼다.
[현성아, 그가 사파인이기는 하지만 네 원수인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만한 일로 흔들려서야 그간의 수양이 다 헛것이로구나. 내일은 대진이 없으니, 내가 미리 말했던 대로 하거라.]
[...사도맹주를 모시라는 말씀 말입니까.]
[그래.] 
김현성은 일전에 사도맹주의 서신을 받았을 때 맹주가 당부했던 말을 떠올렸다. 사도맹주가 현성의 나이 또래이니, 비무가 없을 때만큼은 저더러 말상대가 되어주라는 내용이었다. 맹주의 애제자가 챙긴다고 하면 홀대받는다고 생각하진 않을 거라면서.
[그는 상당히 특이한 사람이야. 만나서 대화나 좀 해 보거라.]
스승의 마음을 제자가 어찌 알련마는,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김현성은 잠잠히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11. 삼진아웃

 아직 이른 봄이어서 화원에는 꽃망울이 듬성듬성 맺혀 있었다. 이기영은 바로 그 옆의 정자에 앉아 꽃들을 바라보며 말없이 차를 홀짝였다. 그의 맞은편에는 벌써 오분째 ― 순전히 이기영의 추측이었다 ― 말없이 자리한 김현성이 있었다.
“계속 말 안 하실 겁니까?”
김현성이 눈동자만 옮겨 이기영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요?”
이기영이 미소 지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 건 아니고? 너 지금 눈으로 나 욕하고 있는데.
뭔지는 몰라도 이 세계의 김현성은 제게 쌓인 게 많은 모양이다. 서로 아는 사이는 아닌 것 같고, 제가 사파인이라는 것 자체가 맘에 안 드는 것일까.
흠. 답답한 속에 다시 차를 한 모금 부어넣었다.
아무리 이 세계의 김현성과 대륙의 김현성이 다른 존재라지만, 똑 닮은 사람이 저를 미워하는 것이 고스란히 보여 이기영은 자꾸만 마음이 급해졌다.
네가 그런 눈으로 보면 나 상처 받아, 현성아. 알아?
초조한 손놀림으로 찻잔을 매만지던 이기영이 이윽고 결심을 굳힌 듯 김현성을 바라보았다.
“좋습니다. 그러면 그냥 가만히 계세요. 제가 말할 테니까.”
상대가 안 나오면 내가 쳐들어가면 된다. 이기영은 우선 칭찬으로 시동을 걸기로 했다.
“정파에서 사람에게 왜 용이니 호랑이니 하는 말을 붙이는지 솔직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과장이 심하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이번에...”
이기영이 김현성을 슬쩍 바라보았다.
“공자께서 싸우는 것을 보고 느꼈습니다. 용과 범의 기상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요.”
과장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였다. 이기영은 며칠 동안 김현성의 비무를 지켜보면서 김현성이 얼마나 파괴적이고 효율적으로 검을 휘두르는지 보았다. 그의 앞에서는 어떤 무기도 소용없었고, 어떤 무공도 빛을 보지 못했다. 사실상 이번 대회는 김현성의 독무대라고 봐야했다.
그러나 진심어린 칭찬에도 불구하고 김현성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칭찬 작전은 실패군. 
이기영은 약간 짜증이 났지만 내색하지 않고 다음 작전에 돌입했다. 이번엔 직구부터 던져보기로 했다.
“공자께서는 제가 그리 맘에 안 드십니까?”
김현성이 약간 놀란 눈으로 저를 바라보았다. 
좋아, 반응이 있군. 
“무엇이 그리 싫습니까? 제가 정파인이 아니라서?”
김현성은 대답하지 않았다. 수긍한다는 뜻이었다. 이기영은 부드럽게 말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김현성의 눈썹이 꿈틀했지만 이기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높음이 있으면 낮음이 있고, 귀함이 있으면 천함이 있지요.”
이기영은 손을 뻗어 화원을 가리켰다. 당장 여기에도, 고운 꽃이 있으면 그 꽃의 뿌리를 갉아먹는 버러지가 있습니다.
“백과 흑은 애초에 함께 가는 것. 세상사가 그러한데, 어찌 외면하시려는 겁니까?”
그러자 김현성이 짓씹듯이 말을 뱉었다.
“자연의 이치는 그렇지만, 인간이 걸어할 길까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기영은 잠시 말을 잊었다. 눈앞의 김현성 위로 고집스럽고 미련했던 대륙의 김현성이 겹쳐 보여서였다. 선의의 중재자. 처음 상태창에 떠올랐던 그의 성향은 분명 그랬던 것 같다. 이제는 좀 많이 변해서 당황스럽지만, 어찌됐든 김현성의 그런 성실하고 고집스러운 부분들은 이기영으로 하여금 그를 동경하도록 만들었었다.
가만히 김현성을 바라보던 이기영은 이쯤에서 변화구를 던지기로 했다. 직구는 제 역할을 충분히 해냈으니까.
“제가 왜 사도맹주가 된 줄 아십니까?”
이기영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목소리에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갑작스레 바뀐 분위기에 김현성이 살짝 동요하는 것이 느껴졌다. 
“저는 사람을 사람 같지도 보지 않는 자들에게 소모품 취급을 당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이기영이 눈을 내리깔았다. 이건 이 세계의 이기영이 기록에 남긴 내용이다. 하지만 진짜 제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렇게 살다가 지겨워서... 내가 세상을 바꿔보겠다 다짐했습니다.”
김현성이 타박하듯 말했다.
“그랬다면 정파의 문파에서 시작하지 그러셨습니까.”
“음, 찾아간 곳마다 그러더군요. 너는 돈도 없고 출신도 천하니 받아줄 수가 없다고.”
이기영의 말에 김현성이 입을 다물었다. 이기영이 슬그머니 웃었다.
“모두가 다 공자 같지는 않습니다. 아무튼 그래서, 길이 이곳밖에 없었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주변이 잠시 고요해졌다. 정자에 부드러운 봄바람이 밀려들어서 둘을 쓰다듬고 지나갔다. 얼마 후 김현성이 입을 열었다.
“세상을 어떻게 바꾸실 생각입니까?”
“저처럼 돈 없고 천한 자들은 먹고 살 수 있도록 해주고, 들짐승 같은 자들에겐 목줄을 채워야지요.”
이기영이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저는 어둠이 더 짙어지지 않도록 할 뿐입니다.”
이기영은 꼭 먼 곳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그렇게 이야기 했다. 김현성은 이기영을 쫓는 제 시선에서 어느 새 분노가 옅어져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이기영은 이쯤에서 한 번 더 공을 던지기로 했다.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면, 제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거지요.”
“예?”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기영이 소매로 입을 가리고 눈웃음 지었다. 이 세계 이기영의 몸뚱이가 일 년을 살지 천년만년을 살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떡밥은 뿌려둘수록 좋으니까.
“그나저나, 괜찮으시면 제 처소에 가서 더 이야기를 나누시겠습니까?”
바람이 점점 차가워지는 것 같네요. 기침을 하는 시늉을 하자 김현성이 복잡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어쩐지 내버려 두면 안 될 것 같지? 막 부축해줘야 할 것 같고 그렇지 않아?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보채지 않아야 하는 법이다. 이기영이 은근히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아, 바쁘시면 이대로 헤어져도 괜찮습니다. 오늘 만나서...”
김현성이 다급하게 치고 들어왔다.
“저! 그리 바쁘지 않습니다.”
“네?”
“맹주님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습니다.”
완벽한 쓰리 스트라이크. 투수 이기영의 승리였다.

 

12. 이 몸, 등장

 아침 햇살이 종이 바른 문을 뚫고 방 안으로 들이쳤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눈을 뜬 이기영은 김현성이 방문을 나설 채비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가십니까?”
부스스 몸을 일으키며 물으니 김현성이 돌아보았다.
“예. 비무가 있기 전에 제 처소에 들릴까 합니다.”
“그렇군요. 조심히 가세요.”
이기영이 나른하게 인사했다. 아침이라 한층 순해진 인상에 김현성은 묘한 감정을 느끼면서 말했다.
“어젯밤에는... 즐거웠습니다.”
이기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저도요. 그런데 오늘 비무해야 할 사람의 잠을 빼앗아서 미안하네요.”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그때였다. 밖에서 시중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맹주님, 기침하셨습니까? 조찬을...”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현성이 문을 열었다. 김현성으로서는 저도 나갈 겸 시중인이 문을 열 수고를 덜어주려 한 것이지만, 시중인은 느닷없이 열린 문에 놀란 모양이었다. 기겁하며 물러나는 시중인을 바라보던 김현성이 말했다.
“맹주께서 일어나 계시니 준비하면 될 것 같소.”
“예? 예, 예.”
“그럼, 가보겠습니다.”
김현성은 몸을 틀어 이기영에게 가볍게 목례하고는 자리를 벗어났다. 시중인의 눈이 옷깃이 흐트러진 채 침상 위에 앉아 있는 이기영을 한 번, 저 멀리 걸어가고 있는 정도맹주의 제자를 한 번 번갈아보았다.

***

 정도맹에서 여는 비무대회는 수상을 목적으로 오는 이들도 있었지만 친목을 목적으로 오는 이들도 있었다. 중원 각지에서 모여드는 고수들과 단시간에 연을 만들기에 이보다 좋은 기회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도맹에서는 맹 안 곳곳의 쉼터를 개방해 사람들끼리 어울릴 장소들을 제공해주곤 했다.
하지만 지금 이기영이 가는 곳은 그보다는 훨씬 사적이고 은밀한 공간이었다. 정도맹 군사의 개인 처소로 가는 중이었으니까.
“어딜 그리 바삐 가시오, 사도맹주?”
이건 또 뭐야. 
이기영은 갑자기 제 앞을 막아선 남자 셋에 떨떠름하게 멈춰 섰다. 그리 대단한 능력치를 지닌 인간들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혼자서 당해낼 수 있는 상대도 아니어서 이기영은 일단 공손히 물었다.
“여러분은 누구십니까?”
“사람들은 우리를 참록삼호(斬綠三虎)라고 부르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강호초출이라.”
“사파는 맹주마저도 무식한가보오. 수많은 녹림 ― 산적 ― 놈들을 베어냈다는 뜻이외다.”
이기영이 속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얘네가 돌았나? 사도맹주한테 못하는 말이 없네. 
순간 어딘가에 기척을 죽이고 숨어있을 호위무사를 불러 내볼까 고민해봤지만 그랬다가 저놈들이 다치기라도 하면 저를 곱게 보지 않는 인간들이 길길이 날뛸 터였다. 이기영은 그냥 조용히 사태를 해결하기로 하고는 웃으며 말했다. 
“몰라 뵈어 죄송합니다. 헌데 제가 약속이 있는지라... 길 좀 비켜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참록삼호인지 참록네 세 고양이인지 하는 놈들이 자기들끼리 마주보고서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그러더니 다시 묻는 말이 가관이었다.
“이보오, 당신 정말 사도맹주가 맞소?”
“네?”
“아니, 내가 듣자하니 말이야, 맹주가 아니라 맹주의 애첩이라는 소문이 있더라고. 그게 사실이오?”
얘네 진짜 미쳤나봐. 너무 유치하고 저속한 공격에 이기영의 말문이 막힌 찰나였다.
“귀빈께 이 무슨 무례입니까?”
북풍한설 같은 냉기를 풀풀 뿜어내며 등장한 것은 진청이었다. 

 

13. 까놓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진짜 범 앞에서 고양이 떼가 도망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진청은 이상하게 늦으시는 것 같아 마중을 나왔다면서 이기영을 데리고 제 처소 안으로 들어갔다. 이기영을 탁자에 앉혀놓은 진청은 잠시 어딘가로 사라졌다가 다기를 들고 다시 나타났다.
“드시지요.”
진청이 내민 찻잔을 받아든 이기영이 우아한 태도로 찻물을 삼켰다.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진청이 저도 차를 한잔 따라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
“제 불찰입니다.”
뜻밖의 순수한 사과에 이기영은 의외라는 얼굴로 진청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의 일이 진청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쯤은 세상 모두가 다 아는 일이다. 하지만 이기영은 그냥 가만히 있었다. 왠지 순순히 사과를 받아주기 싫었다. 대륙에서의 습관 때문인가?
“아신다니 다행입니다.”
뾰족한 말투로 쏘아붙인 이기영이 다시 차를 한 모금 삼켰다. 그리고 찻잔을 탁 내려놓으며 말했다.
“까놓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군사님. 저는 마교가 싫습니다.”
“그렇습니까.”
“남의 일처럼 얘기하시네요.”
진청이 이기영을 빤히 바라보았다.
“구태의연한 사실을 굳이 언급하시는 저의가 궁금할 뿐입니다.”
정도맹이나 사도맹이나 마교의 손에 쑥대밭이 된 것은 마찬가지지만, 자세히 따지고 보면 사도맹의 피해가 훨씬 컸다. 무방비 상태에서 맨 처음 마교놈들을 맞이한 것이 사도맹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건물이 죄 불타 재건하는 데도 무척 고생했다고 들었으니 사도맹이 마교에 치를 떠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진청이 흥미를 가진 부분은 따로 있었다. 마교와의 전쟁 후, 다 허물어져 가던 사도맹을 건네받은 것은 다름 아닌 제 눈앞에 앉아있는 맹랑한 젊은이였다. 그리고 이 젊은 맹주는...
‘채 십년이 되기도 전에 사도맹이 과거의 영광을 되찾게 만들었지.’
관심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진청은 들뜨는 마음을 누르며 이기영에게 물었다.
“정도맹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이기영이 미소 지었다.
“연극에 동참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연극?”
“네, 정도맹과 사도맹의 사이가 좋아졌다는 연극 말입니다. 관람객은 마교이고요.”
참고로 정도맹주께도 똑같이 말씀드렸습니다.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것은 아니니 염려 놓으세요. 
이기영이 여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청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제가 직접 정도맹주에게 물어보면 그만이었으므로.
“저희가 실제로 사이가 좋아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럴 수도 없고요. 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오로지 마교 하나만을 위한 연극이라. 제법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진청이 몸을 약간 앞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이렇게까지 하시는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여야 하니까요.”
손자의 궤도(詭道)를 사용하자는 말이었다. 진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교의 간자를 경계하시는 거군요.”
확실히 지난날 중원이 빠르게 무너진 데에는 마교의 세작들이 정파와 사파를 가리지 않고 침투해 있던 탓이 컸다. 진청이 여유롭게 평했다.
“나쁘지 않은 처방입니다.”
겸손과는 거리가 먼 말투였다. 하지만 그 오만함이 무섭도록 잘 어울렸다. 문득 진청이 생각난 듯이 물었다.
“저와 차를 마시자고 하신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까?”
“...아뇨.”
이기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그냥 제가 아는 사람을 닮아서요. 속도 그런지 보고 싶었습니다.”
진청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황당하군요. 그래서, 닮았습니까?”
“네.”
무섭도록요.
“가끔 찾아뵈어도 될까요?”
진청이 이기영을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일 때문이라면 좋습니다.”

 

14. 오해를 단단히 샀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갑자기 이기영이 묵고 있는 숙소로 쳐들어온 이지혜가 방 안에 놓인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이기영은 이지혜의 기세에 눌려 얌전히 침상에 걸터앉았다.
“어젯밤에 정도맹주께서 절 찾아오셨습니다.”
“네? 왜요?”
아니, 그 아저씨 웃기네. 남의 군사 데리고 뭐하는 짓이람? 
자기야말로 정도맹 군사의 처소를 뻔질나게 드나드는 이기영이 발끈했다. 이지혜가 딱딱하게 대꾸했다. 
“맹주님 좀 말려 달라 하셨습니다.”
“저요?”
이기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모습이 어찌나 순진해 보이는지. 이지혜는 복잡한 심경으로 정도맹주에게 들은 말을 떠올렸다. 요즘 제자가 밤만 되면 사라져서 뒤를 밟았더니 사도맹주의 침소로 기어들어가더라는 이야기, 또 진 군사가 낮에 자꾸 바쁘다는 소리를 해서 몰래 가보니 사도맹주와 차를 마시면서 하하호호 하고 있더라는 이야기였다. 
덧붙여 이른 아침에 정도맹주의 제자가 사도맹주의 방안에서 얼굴이 상기된 채 나오더라는 소문은 너무 파다해서 이지혜도 여러 번 들은 차였다.
이기영 공자가 일의 압박감을 견디다 못해 일탈을 벌이는 것인가? 아니면 이 세계에 떨어진 외로움을 이렇게 푸는 것인가? 어느 쪽이든 탄식을 금할 길이 없었다.
“사람들이 뭐라는 줄 아십니까? 사도맹주가 미인계를 쓴다고 합니다.”
이기영이 그제야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총사, 아까부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저는 그런 걸 쓴 적이...”
그러나 이지혜는 이기영의 말을 무시하고 슬픈 눈초리로 말했다.
“이기영 공자, 저희 사이에 그냥 솔직히 말해보십시오.”
아니 그러니까 무슨 소리냐니까. 이기영이 슬슬 짜증이 날 무렵, 이지혜가 폭탄을 던졌다.
“혹시 남색이 취향이십니까?”

***

 오해가 풀린 후에 이기영은 한동안 자중했다. 사실 좀 억울하기도 했다. 이 남정네들이 얼마나 타인과 교류를 안 했으면 이런 오해가 생긴단 말인가? 
그래, 내가 잘난 게 죄다. 이기영은 그런 마음으로 때 아닌 독수공방을 하며 지냈으나, 비무대회 결승을 하루 앞두고 끝끝내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군사님!”
방 안으로 뛰쳐 들어온 맹원의 얼굴이 새파랬다. 진청은 심각한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하며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그것이, 사도맹주께서...!”
“이기영 맹주께서?”
“자세한 것은 가면서 설명 드리겠습니다. 어서..!”
어지간히도 급한 일인 모양이었다. 진청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맹원의 뒤를 따랐다.
그 시각 사도맹주의 처소는 발칵 뒤집혀 있었다. 손님들과 다과를 즐기던 사도맹주가 별안간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기 시작한 것이다. 
“맹주님! 정신 차리십시오!”
“맹주님!”
“이럴 게 아니라 침실로 옮깁시다!”
누군가는 의원을 부르러 뛰어가고 누군가는 이기영을 들어 침실로 옮겼다. 난리 통에 바닥에 나뒹구는 찻잔을 주어든 이지혜가 냄새를 맡아보더니 미간을 찡그렸다.
‘약을 탔군.’
그것도 아주 질이 나쁜 약이다. 이지혜는 이기영의 호위무사에게 몇 가지를 당부하고는 그대로 경공을 펼쳐 자리를 벗어났다. 잠시 뒤 이지혜가 정도맹주와 김현성을 데리고 다시 등장했을 때는 진청도 이기영의 침실에 도착한 상황이었다. 
“어찌 된 일인가?”
정도맹주의 물음에 이지혜가 대답했다.
“춘약입니다.”
“춘약...!”
방 안에 있던 이들이 일제히 숨을 들이켰다. 춘약이라 하면 미약, 그러니까 최음제의 일종으로, 일단 먹었으면 관계를 맺어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 저잣거리에서 쓰였어도 도의에 어긋나는 물건이거늘, 정도맹 한복판에서 감히 그런 물건이, 그것도 손님에게 사용되었다는 것은 정도맹의 명예를 땅바닥에 팽개친 사건과 다름없었다.
정도맹주가 분노로 수염을 파르르 떨면서 외쳤다.
“누가 이런 추잡스런 일을 벌였단 말인가?”
“그것이...”
그것은 이지혜로서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쥐죽은 듯 조용해진 방 안에서 어디선가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맹주님...”
이기영이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오, 사도맹주, 정신이 드시오? 이 무슨...”
“모두... 모두 물려주셨으면 합니다.”
사도맹주는 눈을 뜨는 것도 힘겨운지 숨을 색색 내쉬면서 말했다. 어떻게든 혼자 해결하려는가 싶어 안쓰러워 아무 말도 못하고 서 있는데, 정도맹주의 귓가로 전음이 날아들었다.
[맹주님. 현성 공자, 진 군사만 남겨놓고 모두 물러가라 일러주십시오.]
응? 정도맹주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 했소?]
[사람들을 모두 물려주십시오. 맹주님과 현성 공자, 진 군사만 빼고요.]
이기영은 그러면서 힘없이 늘어진 손끝으로 정도맹주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맹주님... 어서...”
오르락내리락 하는 가슴팍은 곧 숨이 끊어질 사람처럼 보이건만 귓가로 들려오는 전음은 선명했다. 정도맹주는 일단 사도맹주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모두 물러나시오!”
정도맹주의 일갈에 사람들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뭘 어떻게 하려고? 하는 표정들은 정도맹주의 다음 말에 경악으로 물들었다.
“진 군사와 현성이는 남거라.”
사람들이 좀체 움직이지 않자 결국 맹주가 다시 한 번 모두 나가라며 노성을 터뜨렸다. 그제야 부지런히 방을 벗어나기 시작하는 사람들 틈으로, 이지혜가 이기영에게 다가와 빠른 목소리로 뭔가를 속삭이고는 인파에 섞여 빠져나갔다. 그때 인파 틈에서 누군가가 망연하게 중얼거렸다.
“남자를 셋이나..?”

 

15. 셀프기프팅

 문이 닫히고 사람들의 기척이 멀어지자마자 이기영은 몸을 일으켰다. 화들짝 놀라 부축해주려는 김현성의 손을 밀어내며, 이기영이 말했다.
“저 안 마셨습니다.”
세 남자의 눈이 둥그레졌다.
“약 안 먹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구요. 필요해서 잠깐 쓰러진 척을 한 것뿐입니다.”
김현성과 진청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한쪽이 안도의 한숨이었다면 다른 한쪽은 골치가 아파서 내쉰 한숨이었다. 반면 정도맹주는 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약 기운을 해소하는 데 이기영과 정분이 났던, 아니, 교분이 있던 둘은 몰라도 자신이 껴 있는 건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참이기 때문이다.
약간의 우여곡절 끝에, 네 사람은 방 안에 있는 탁자에 둘러앉았다. 김현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일단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알고 싶군요.”
이기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이것은 정파인이 저지른 짓이 아닙니다.”
진청이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리 단언하십니까?”
“사용된 약은 사파 문파들 사이에서 불법 유통되고 있는 미약의 일종입니다. 계속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기에 몇 달째 추적 중이었는데... 이런 깜찍한 짓을 하는군요.”
깜찍한 짓이라니.. 정도맹주가 침음했다. 
“하지만 세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오. 대체 우리를 무어라 욕할지...”
이기영이 방긋 웃었다.
“그래서 말인데, 세 분이서 절 좀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도와준다? 어떻게 말인가?”
“영악한 쥐새끼를 잡으려니 보통 인력으로는 안 돼서요. 쥐덫을 구상할 사람이 필요하고, 무력이 필요하고, 허가가 필요합니다.”
이기영이 차례로 진청과 김현성, 정도맹주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쐐기를 박듯 읊조렸다.
“연극의 제1막은 이것으로 하지요.”

***

 다음날 이기영이 눈을 떴을 때는 푹신한 매트리스 위였다. 어딘지 익숙해 보이는 천장을 바라보며, 이기영은 자신이 대륙으로 돌아왔음을 느꼈다. 이 세계로 갈 때나 올 때나 예고가 없는 것은 똑같은 모양이었다.
‘근데 참 애매한 타이밍에 왔네.’
진청을 탈탈 털어 계획을 세우고 김현성을 데리고 막 원정길에 나서려는 참이었다. 제가 돌아왔으니 그 세계의 이기영도 잘 돌아갔겠지만, 쪽지 하나 남겨놓고 오질 않아서 제 계획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지 걱정됐다. 그래도 그거야 그 사람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사실 정말로 아쉬운 것은 이거였다.
‘기껏 현성이랑 진 군사 감아놨더니 저쪽 이기영이 홀랑 채가게 생겼자너.’
뭔가 죽 쒀서 개 준 꼴이 된 것 같아 배가 아프다가도, 그냥 저쪽 이기영에게 선물을 준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어찌 됐든 그 세계의 자신도 꽤 기구한 삶을 살았던 것 같으니까. 제가 옆에 괜찮은 사람들을 주렁주렁 달아놓았으니 앞으로의 삶은 조금 나아질 게 분명했다.
그나저나 그 세계의 이기영이 저와 비슷한 성품이라면, 틀림없이 이쪽에도 뭔가를 남겨놓았을 텐데...
그 순간 이기영은 제 양옆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옆구리가 뜨끈뜨끈한 게 꼭 사람 체온 같은 것이... 등골을 타고 오르는 불길함을 감지하기도 전에 이불이 젖혀졌다. 그리고 오른쪽과 왼쪽에서 각각 검은 머리의 남자와 흰 머리의 남자가 솟아올랐다.
“일어나셨습니까, 기영 씨?”
“일어났나, 이기영?”
이기영이 입을 벌렸다.
“현성 씨? 군사님?”
아니, 둘이 왜 나랑 같은 침대에... 게다가 왜 둘 다 아무것도 안 입고 있어?
진청이 손을 뻗어 이기영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군.”
그에 질세라 김현성이 이기영을 품안으로 끌어당기면서 말했다.
“어제 너무 무리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어젯밤에 우리가 뭘 했는데?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고개 숙여 제 뺨에 입 맞추는 두 남자를 보자니 숨이 턱 막히면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바로 저쪽의 이기영이 나한테 준 선물이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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